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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최윤
崔允, 최현무
카페에 들어가 얼마간 앉아 있을 수 있는 권리, 그와 유사한 소멸성의 무수한 쾌락을 위해 그녀는 하루 종일 깨알 같은 숫자를 맞추고 한두 숫자 때문에 야근을 해야 하는 경리 부서의 일을 참아내고 있다. 여자에게 착각은 없다. 그 일 외의 다른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테면 그냥 해보는 불평이다. 불평은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이기에 그녀도 불평을 잘하는 법을 습득한다. 여자는 말솜씨 덕분에 실제 그녀가 받아야 하는 대접보다 한결 나은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여하튼 여자는 늘 더 나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 기회는 엿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기회를 갈취하기 위해서, 거머쥐기 위해서 앞으로 튀어 나가야 하는데 그 힘이 그녀에게 부족하다. 여자에게는 보조 모터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자는 결혼을 생각했고 오늘 이 거리를 걷고 있다. ---p.8
남자의 일반적인 무표정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실제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는 괴벽이 있는 동료를 이해한다. 까닭 없이 화를 내는 상사의 분노의 원인을 주변에 설명해줄 수 있다.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든 아니든. 누군가 부당하게 남자의 따귀를 갈겼다 치자. 그는 다음 날 따귀를 친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게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남자는 그런 사람이다. 남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남도 자기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좋다. 그는 ‘사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시하고 상식적인 것으로는 남자를 놀라게 할 수 없기에 남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체적인 일에 대해 무덤덤하다. 그는 쾌락을 중요시한다. 지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자극에 남자는 민감하다. 고통을 싫어하는 그는 아마도 육체적인 두려움 때문에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고통이나 쾌락만큼 구체적인 현실은 없다. 남자가 고통 대신 쾌락 편으로 기운다고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 남자는 뜨뜻미지근하다. 인생의 열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렸다. 여름과 가을이 만나 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을과 여름이 만나 겨울이 되었다. 이것이 이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pp.23-24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나를 낳아준 한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상을 했다. 잦은 결석으로 학교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나는 일찍이 부모가 수소문한 미술 치료사에게서 그림을 배우면서 소일하고 있었으니 내게는 상상할 시간이 많았다. 나의 한 자아는 무덤덤한 반응을 선택했지만 누가 자신의 원천에 대해 궁금하지 않겠는가. 내게도 나만의 동영상이 있었다. 영상은 짧고 흐릿하다. 그 짧은 가상의 동영상의 주인공은 지금의 나보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 더 많은 나이에 결혼했으리라고 추정되는 한 젊은 부부다. 나의 나이와 입양 서류에 적힌 그들의 탄생일을 나는 계산해본다. 나는 그들의 삶에 매일 조금씩 상상의 물을 준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삶이 자란다. 조금씩 자라는 듯하다가는 멈춘다. 한 부부의 삶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매번 죽음으로 직진한다. ---pp.206-207 |
주인공은 ‘남자’와 ‘여자’ (이들에게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 ‘나’ 이렇게 3명이다. 복잡하고 치열하고 각박한 ‘80년대 서울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 소시민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고 자신들의 계층 상승을 위해 여러 계획에 몰두하는 과정이 작품의 초중반부. 작품의 후반부는 여름휴가를 맞아 떠난 계곡 바캉스에서 급작스러운 태풍으로 인한 남자와 여자의 죽음 이후 해외로 입양된 ’나‘가 친절한 양부모 밑에서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어린 시절 흔적을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나’가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자신의 친부모가 바로 그해 여름, 사고로 죽은 그 계곡의 그 장소다. ‘나’는 그곳에 서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저무는 석양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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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최윤, 8년 만의 신작 장편
“엄마는 절망이 일깨운 지혜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천천히, 미약하게, 어느 햇빛 따뜻한 아침 조용히 나를 깨우듯이,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여전히 현재형인 구차한 욕망에 대한 연민, 이미 퇴화해버린 영혼의 감각, 기능을 잃은 말에 대한 슬픔. 이런 것들이 『오릭맨스티』를 쓰는 내내 따라다녔다. (최윤) 2011년 봄부터 2011년 가을까지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된 최윤의 『오릭맨스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회색 눈사람」으로 제23회 동인문학상을, 「하나코는 없다」로 제1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최윤이 오랜 침묵을 깨고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로, 최윤 특유의 냉정하고 절제된 문장 속에 파국을 향해 치닫는 지리멸렬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긴 호흡으로 느낄 수 있다. 고통과 쾌락을 반복하며 쌓아올리고 허물어지는 모래성 같은 인간의 생(生) ‘여자’는 젊음 외에는 이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다. 좋게 말하면 평범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평균 미달의 집안과 학력과 외모와 직업을 가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세속적 욕망과 계층 상승의 꿈이 도처에 존재했던 1980년대의 서울, ‘여자’는 자기 삶이 더 나은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 결혼을 마음먹는다. ‘남자’도 젊다. 또한 50대 후반의, 할머니라기에는 아직 젊은 모친을 가지고 있는 편모슬하의 2대 독자다. 탄탄한 중견기업의 촉망받는 영업사원인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사회적인 성격과 선량한 겉모습을 지녔지만 내면에는 미지근한 쾌락에 대한 촉수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딱히 열망하는 것도, 절박한 충동도 없다. 그런 그가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결혼을 마음먹는다. 그리고 ‘나’가 있다. 그들이 낳은 아이다.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박유진, 그러나 부모가 사망하자 생후 2년 만에 벨기에로 입양 간 후 유진 뒤발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원인불명의 병을 앓는다. 급작스러운 혼절과 의식불명이 증상인 이 미증유의 희귀병에 시달리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나’는 가족의 헌신적인 애정과 보호 속에서 자랐다. 마치 스위치를 내리는 듯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을 ‘나’는 블랙홀 여행이라 부른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을 되찾으면서 그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소리는 언제나 단 하나다. “오릭맨스티……” 부모는 뒤돌아보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이 유일하게 세상에 남긴 것은 마음의 어느 부분이 파괴된 한 아이 『오릭맨스티』는 더 나은 세속의 삶을 추구하려고 발버둥쳤던 남녀의 짧고 불우한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변화하는지를 담담히 풀어놓은 소설이다. 인간의 삶은 혹은 이 세상의 일이란 당사자 개인이 아무리 계획하고 노력해도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외부의 일 속에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뀐다. 누구나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고 인생을 자기 방식대로 설계하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나 구조 속에서 단독자는 허약한가. 우리가 열심히 쌓아올린 인생은 어느 한 순간, 단 한 번의 외부 충격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아무 잘못이 없이도, 어떠한 악의가 없이도 때로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한 생의 아이러니를 최윤은 절제된 대화와 인물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단정하고 힘 있는 서술의 문장 속에서 촘촘하게 뽑아내어 독자의 눈앞에 보여준다. 더 길어진 수명, 더 높아진 생존 비용,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물질과 욕망을 ‘기본’, ‘평균’이라는 항목으로 묶어두고 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꾸만 왜소해지고 시들어가는 한 인간의 실존에 이 소설은 더없이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여자’와 ‘남자’는 특별히 악하지도 않고 남달리 선하지도 않은 흔한 인물들이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타협할 줄 안다. 그들의 목표는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는 당신과 당신 주변의 인간들처럼 그들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의 파국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소설은 어른이 된 ‘나’가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우고 자신의 부모의 사망 기사를 번역하고, 직접 생애 첫 해외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부모의 사망 장소를 찾아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 장소에 서 있는 ‘나’가 바라본 것은 붉게 저무는 석양,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 오릭맨스티. 작가의 말 중에서 | 최윤 여전히 현재형인 한 젊은 여자와 남자의 구차한 욕망에 대한 연민, 그들의 삶을 내리 누르는 수면 상태처럼 어떤 방법으로도 깨어나지 않는 어쩌면 이미 퇴화해버린 영혼의 감각, 기능을 잃은 말에 대한 슬픔. 이런 것들이 『오릭맨스티』를 쓰는 내내 그늘이 되어 따라다녔다. 한 사람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상식과 일상 속에 자리 잡은 반생명적이며 비본질적인 것들은 결국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것이 생명의 엄연한 질서다. 그러나 그 질서에 이르기 전에는 고통도 있고 죽음 같은 단절도 있으며 삶의 어떤 부분이 파괴된다. 그리고 언어가 있다. 언어의 확장된 기능을 통해 때로 정화도 일어나고 회복도 가능하다. 『오릭맨스티』는 그런 언어를 경험하면서 또한 갈망하면서 씌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