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류트 어떤 휴머니스트 몰락 가짜 본능의 기쁨 고상함과 위대함 비둘기 시민 역사의 한 페이지 벽 -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킬리만자로는 모든 게 순조롭다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지상의 주민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역자 후기 |
Romain Gary,에밀 아자르
'새들은 죽기 위해 페루로 간다'
- 유서영 (berrius@yes24.com)
단편집이라 그런지 작품 마다 느꼈던 단상들이 먼저 스친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쓸쓸하고, 외롭고, 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이들이 모이는 어느 바다. 손님 없는 술집,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주인 남자, 통속적인 드라마처럼 어느 날 나타난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들이 신선했다. 고양이처럼 몸을 일으키는 바다, 다채롭게 빛나는 하늘, 점점이 섬 위를 나는 새들. 원제에 충실 하려면 제목은 '새들은 죽기 위해 페루로 간다' 여야 한다. 겉멋이 잔뜩 들어간 제목이지마는 '죽기 위해 어느 곳을 향한다.'와 '페루'라는 지명이 매력적이기 그지없다. '죽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향하는 것'은 의지다. 죽으려는 의지라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페루'에서 죽으려면 '페루'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살아있어야 한다. 끝내기 위해 도착한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여자는 그를 살게 해줄 수 있을까? 자전적인 색깔이 묻어나는 '류트' 에서 작가는 성공한 외교관으로 완벽한 가정과 예술에 관한 고상한 취향을 가진 N백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성공한 중년남자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늘에 가려진 듯한 아내의 심리묘사도-단 몇 페이지 속에서-마음 졸이며 살아왔을 인생까지 녹여내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창조주가 숨을 불어넣듯 매력 넘치는 인물들을 만들어 놓고 결말에는 장난을 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엔딩은 차라리 천진했던 것 같다.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낸 자전적인 느낌의 '가면의 생'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가면의 생'에서는 천진함, 순수함이 어떻게 분열하고 망가지고 너덜너덜해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내 경우는 본 단편집을 나중에 읽었기에 더 안타까웠다.)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류트', '몰락', '가짜'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는 탐미주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순수함을 읽을 수 있다. 그에 뒤따르는 배반도 있다. 아름다움은 쫓는 이를 배신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먼 이는 주변 사람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진다. 고귀한 목표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사는데 '대의'나 '목표' 따위는 정말 필요한 걸까. 언제 어떻게 배신당할지 모르는데. 희망을 주지 않으면 좋겠다. 결국엔 희망이 이긴다, 절망하더라도 꿈을 쫓으라던 고전들을 처음으로 원망했던 때가 떠오른다. 어쩌면 나는 자의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들이 있다. 사라진 생명들처럼, 떠나간 관계들처럼 세상에 머물수록 내 손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은 늘어만 가고, 갖은 유희들도 지루해진다. 이 작가는 대체 어떤 배반을 당했기에 이토록 쓴 결말을 내놓는 걸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년스러움'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불행하게도 뒤늦게 철이 든 이 소년이 잔인한 어른으로 자라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마지막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낯설었을까. |
즈보나르는 아침마다 낙서들을 다시 읽는다.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는 데는 분노만한 것이 없다. “나는 너에게 인사한다, 인간이여, 너 자신의 영원한 선구자여! 지드라브코 안드릭, 베오그라드 대학교 문과대학 재학중.” “인간이란 아직도 전신(前身)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완성된 존재가 되리라. 파벨 포블로빅, 사라예보 법과대학 재학중.” 그리고 프랑스 시인 앙리 미쇼가 그런 주제에 대해 쓴 글을 자랑스럽게 인용하고 있는 낙서도 있다. “그는 하나의 돌멩이에 걸려 비틀거린다. 걷기 시작한 지 2만 년만에 그는 자신을 겁주려는 증오와 경멸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더 아래에는 다른 글씨체로 이런 글이 휘갈겨져 있다. “이런 고상한 사상을 품은 유고슬라비아의 애국자들, 오늘 독일군에게 총살당하다.”
하지만 독일인은 바통을 이어받았을 뿐인걸, 하고 즈보나르는 생각한다. 그들은 횃불을 좀더 멀리 가져갔을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의 위업을 계승했을 뿐. 그 자신도 결론 삼아 낙서에 한 줄을 덧붙였다. “인간의 문제, 그것은 모두가 연루되는 치사한 문제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자마자 오줌을 갈기고 싶은 벽이 있는 법이 아니던가. --- pp.159-160 |
인간이라 -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좀더 버텨야 해. 1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뿐이지만 - 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 p.5 |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있었다. --- p.31 |
물론 그럴싸한 구실은 찾아낼 수 있었네. 어쨌든 그 처녀와 쾌락의 파트너는 비극이 일어난 방과 얇은 벽 -얼마나 앏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걸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들이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한 주된 동기는 특별한 호기심 -변태적이든 파렴치한 것이든 마음대로 생각하게-에서였다는 사실을 자네에게 숨기지 않겠네. 나지막한 신음과 숨소리로 그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그 '천사 같은 여자'를 한 번 보고 싶었다네. 나는 그 방 문을 두드려 보았네. 아무 대답이 없었지.
--- pp. 180~181 |
그는 문득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엉킨 감정.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피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이 모래 위를 걸으며 아직 파드득거리는 새들을 찾아내서는 신발 뒤축으로 숨을 끊어놓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 몇몇을 그는 두들겨패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자신이 이 연약하고 상처입은 존재의 호소에 이끌려 그것을 끝장내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젖가슴 위로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날 역겨워하시지 않느군요." 그녀가 엄숙하게 말했다. --- p. 24 |
"나도 압니다." 하고 말러가 대답했다. "그래서 난 녀석을 수의사들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지요. 녀석에겐 특별한 조치가 필요해요. 날 떠나면 보름도 못 살 거예요."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그나츠." 세바스티앙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을 만나는 걸 막을 권리는 당신에게 없어요." "사태를 직시하셔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말러 씨." 소녀가 말했다. "세바스티앙이 인간이라는 사실 말예요." "인간이라니!" 말러가 소리쳤다. "들으셨지요, 선생님? 그렇다면, 나는 인간입니까? 선생님......" --- pp. 130~131 |
"나도 압니다." 하고 말러가 대답했다. "그래서 난 녀석을 수의사들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지요. 녀석에겐 특별한 조치가 필요해요. 날 떠나면 보름도 못 살 거예요."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그나츠." 세바스티앙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을 만나는 걸 막을 권리는 당신에게 없어요." "사태를 직시하셔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말러 씨." 소녀가 말했다. "세바스티앙이 인간이라는 사실 말예요." "인간이라니!" 말러가 소리쳤다. "들으셨지요, 선생님? 그렇다면, 나는 인간입니까? 선생님......" --- pp. 130~131 |
공쿠르 상을 두 차례 수상한 유일한 작가, 로맹 가리!
로맹 가리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Les oiseaux vont mourir au P rou』(1962)가 김남주씨의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져 있는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파리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8년 만에 파경을 맞았던 부인 진 세버그(영화배우)가 자살한 지 1년 뒤의 일이다. 참전중에 쓴 첫 소설『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로맹 가리는『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두번째 공쿠르 상을 수상함으로써 평단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표제작「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포함해 열여섯 편의 기막힌 단편들로 엮어진 이번 소설집은 로맹 가리의 문학적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편 한 편이 인간과 삶에 깃든 숨은 진실과 감동을 전한다. 세상의 끝, 희망의 끝, 그 모든 끝의, 생의 비리고 안타까운 아름다움 야망과 열정의 인간이었으며, 꿈과 모험을 사랑했던 불세출의 작가 로맹 가리. 세기를 풍미한 거장의 진면목을 확인케 하는 열여섯 편의 기발하고 멋진 소설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거대한 허영에 대한 신랄한 탄핵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기만에 대한 로맹 가리의 날카롭고 흥미진진한 적발과 풍자는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영토를 늘 그 속에 품어냄으로써 쓸쓸하지만 심오한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가슴을 뒤흔드는 여운을 잊지 못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에서, 인간의 그 오랜 분석(糞石) 위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인간'을 기다리며 지금-이곳의 안타까운 인간의 얼굴을 발굴해내는 작가의 정교한 손길에 새삼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 거장의 진면목을 확인케 하는 열여섯 편의 뛰어난 단편들 세계의 끝, 페루의 외딴 바닷가로 새들이 날아와 죽는다. 때가 되면 새들은 죽기 위해 먼길을 날아와 모래 위로 떨어진다. 로맹 가리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이렇게 홀로 그것을 바라보는 한 외로운 사내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섬세하게 짠 구절들을 음영이 있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돋보이는 또다른 단편「류트」, 인간성의 이면을 시니컬하게 그리고 있는「어떤 휴머니스트」, 빠른 호흡, 거친 말투, 반전과 긴박감으로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몰락」, 성형의 비애를 신랄하게 꼬집는 「가짜」, 자신이 줄곧 천착해오던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분히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비둘기 시민」, 거리두기와 뒤집어보기를 통해 참신한 정복자의 모습을 그려낸「역사의 한 페이지」, 서머싯 몸을 방불케 하는 반전을 준비해둔「벽」과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피학적인 묘사의 위력을 과시하는「지상의 주민들」, 인간의 욕심에 일격을 가하는「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나치 학대를 다룬 소설의 새 경지를 개척한「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그리고 특별히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메시지가 담긴「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에 이르기까지 총 열여섯 편의 단편들에서는 세계와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의 독특한 해석으로 각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