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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사기 본기
표·서
사마천 박일봉 편역
육문사 2012.05.15.
판매자
깡지북
판매자 평가 4 76명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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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소개

책소개

목차

서문

본기
삼황본기
제1 오제본기
제2 하본기
제3 은본기
제4 주본기
제5 진본기
제6 진시황본기
제7 항우본기
제8 고조본기
제9 여태후본기
제10 효문본기
제11 효경본기
제12 효무본기

표 서
제1 삼대세표
제2 십이제후연표
제3 육국연표
제4 진초지제월표
제5 한흥이래제후왕연표
제6 고조공신후자연표
제7 혜경간후자연표
제8 건원이래후자연표
제9 건원이래왕자후자연표
제10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제1 예서
제2 악서
제3 율서
제4 역서
제5 천관서
제6 봉선서
제7 하거서
제8 평준서

저자 소개1

사마천

司馬遷,자장(子長)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768쪽 | 155*226*40mm
ISBN13
9788982031137

출판사 리뷰

≪사기≫에 대하여

≪사기≫는 사마천의 찬저로서, 청의 건륭 연간에 중국의 정사로 정해진 ‘이십사사’의 머리에 위치하는 역사서다. 처음에는 사마천이 ‘태사공서’라고 이름 지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사기≫라 일컬었다. 그 구성은 ‘본기’ 십이 권, ‘표’ 십 권, ‘서’ 8권, ‘세가’ 삼십 권, ‘열전’ 칠십 권으로 도합 일백삼십 권이다.‘본기’는 황제로부터 한무제까지 역대 왕조의 제왕, 즉 고대 중국 통솔자들의 편년사이고 ‘세가’는 제왕을 떠받드는 제후국의 열국사이며, ‘열전’이란 ‘본기’에 이어지기도 하고 혹은 ‘세가’에 이어져 역사를 채색하는 개인의 기록으로서 전기집인 동시에 각양각색의 인간상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표’는 연표고 ‘서’는 제도사다.

‘본기’에서 ‘열전’까지는 모두 다른 성격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전체를 하나로 정리하면 종합사가 된다. 이와 같은 역사서의 기록 형식을 ‘기전체’라 하는데 그 형식은 반고에게 이어져 ≪한서≫가 작성되고 다시 그 뒤의 모든 정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중국 역사서 기록 형식에는 ‘편년체’라 하는 또 하나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송의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완성한 형식으로 기전체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서 기록의 기본 형식이 되어 왔다.

≪사기≫는 사마천 원저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마천이 기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간이며 그것을 가죽끈으로 철한 것이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그것은 정·부 두 본으로 되어 있는데 정본은 명산에 보관하여 망실에 대비하였고 부본은 경사에 보관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후세를 초들 것까지도 없이 한대에도 ≪사기≫를 면학하고 초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차 이동함에 따라 가죽끈이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죽간 자체가 더렵혀지기도 하고 분실되기도 해서 차츰 탈간이나 착간이 있었을 것이다.

전 일백삼십 권 가운데 일찍이 한대에는 「효경본기」 제11, 「효무본기」 제12, 「예서」 제1, 「악서」 제2, 「병서」 제3,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제10, 「삼왕세가」 제30, 「부근괴성열전」 제38, 「일자열전」 제67, 「귀책열전」 제68 등 열 권은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이 그것을 보충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 송 때 사람인 배인의 찬저인 ≪사기집해≫ 일백삼십 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부터 약 육백 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착간 또는 서사 때의 오기 등으로 초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당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나 당대에는 사마정이 ≪사기집해≫를 근거로 ≪사기색은≫ 삼십 권을 짓고 또 「삼황본기」를 보충하여 이에 주석을 붙였다. 그 후 장수절이 다시 ≪사기정의≫ 일백삼십 권을 지었다. 이것은 고실을 널리 인용하여 음의도 타당하다고 알려졌다. 이 ≪색은≫과 ≪정의≫의 출현이 대체적으로 지금의 ≪사기≫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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