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씨앗은 17년 전 대학 도서관에서 데이비드 웰스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읽던 중에 처음 내 마음속에 심어졌다. 《거룩하신 하나님》에서 데이비드는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너무 가벼운 존재로 격하시켰다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교회가 제시하는 “그분의 진리는 너무 멀고, 그분의 은혜는 너무 평범하고, 그분의 심판은 너무 약하고, 그분의 복음은 너무 쉽고, 그분의 그리스도는 너무 흔하다.” 교회는 부차적인 것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정작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이 세상의 방식과 맛에 너무 길들여졌다. 따라서 점점 더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세상과 다르지 않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그 책의 후반부에서 한 문단을 읽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성경 외에, 데이비드의 다음 말만큼 내 마음을 울리고 내 안에 소망을 일으킨 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나는 이 글을 가지고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쇄신을 촉구해 왔다.
복음주의 교회들이 진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교회가 살아 있는 영성을 발하기를 원한다. 교회가 단순히 포스트모던 세상의 메아리가 아니라 대안이 되기를 원한다. 과감히 세상과 다른 길로 가고 충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변함없는 확신을 보여 주는 교회, 지금과 같은 문화적 붕괴의 한복판에서도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남을 교회를 원한다.
이런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미래를 위해 이 소망을 품고 온 몸으로 실현에 앞장서는 차세대 리더들이 필요하다. … 개인적인 왕국을 건설하고픈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리더들이어야 한다. … 성공하기 위해서는 큰 비전의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법, 나아가 그 말씀의 하나님 앞에서 사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이 이 시대에 맞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다시금 교회가 사회적 트렌드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정체성과 모든 활동의 중심으로 놓는다면 세상에 필요한 빛과 소금, 세상을 위한 반문화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라
하지만 현실은 답답하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변 세상만큼이나 성공과 인기, 권력, 명성에 눈이 멀어 있는 듯하다. 자기희생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상반되는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들끓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자기희생적인 종들이 아닌 교만한 슈퍼스타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어떤 목표와 꿈이 우리를 움직이는지 솔직히 돌아보라. 그러면 우리가 주변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밖의 세상을 손가락질할 입장이 전혀 못 된다. 명성과 부, 권력, 감투를 추구하는 모습이 신자나 불신자나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
크리스천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유행을 따라가며 세상 사람들이 좇는 것을 좇기 위해 시간과 돈과 지적 에너지를 쏟고 있다.
하지만 나는 큰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큰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한다. 교회가 폴리갑과 같은 믿음의 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폴리갑은 하나님께 흠뻑 빠진 사람이었다. 나도 그처럼 하나님께 흠뻑 빠지고 싶다. 폴리갑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토록 무시무시한 위협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그는 세상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극심한 압박 속에서도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심심풀이도 아니요 인기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늘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삶을 살
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내와 한가로이 노닐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를 위해 이 한 몸을 불사르고 싶다. 영적으로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나 치다가 가고 싶지 않다. 영적 바다로 온몸을 던져 세상과 전혀 다르게 살고 싶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기를 머뭇거렸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청교도들의 말처럼 ‘단 한 분의 청중’ 앞에서 살고 싶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어떻게든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내보여야 할 때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목표와 동기를 품고 세상과 다른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재물에 대한 시각과 라이프스타일은 물론이고 인간관계까지 모든 것이 주변 세상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예배하고 잡을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산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삶이 황당하고 어리석고 별나 보인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이런 삶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정확히 어떤 접근법을 취해야 하는가? 교회와 세상, 그리스도와 문화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인가?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로부터 크리스천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에 다가갔다. 한쪽 끝에는 소박하고 엄숙한 아미시(Amish) 파가 버티고 있고, 다른 쪽 끝에는 피어싱과 문신으로 온몸을 도배한 젊은 목회자들이 있다. 어떤 집단은 세상을 질타하거나 세상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어떤 집단은 부지불식간에 세상과 융화되었다.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가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이란 책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 문화를 비난하거나 모방하거나 소비하는 교회가 너무도 많다.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세상과 진흙탕 싸움을 벌이거나 세상에 동화된 교회들 말이다.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더 좋은 방식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을 저 거룩하고도 높은 곳에서 죄로 물든 밑바닥 세상까지 끌어내린 열정적이고도 비전적인 사랑, 바로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크리스천이 그 해답이 될 수 있겠다.
성경은 양쪽 귀를 열고 살아라고 분명히 말한다. 한쪽 귀는 세상의 질문에 열려 있고, 다른 쪽 귀는 말씀의 답에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잘 해석할 뿐 아니라 세상 문화도 잘 해석할 책임이 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잇사갈의 자손처럼 되라고 말씀하신다(대상 12:32).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제자라면 세상 문화에 무관심하지 않다. 우리는 시대와 교회의 사명을 둘러싼 모든 문제에 관해 진지하고도 철저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고민할 책임이 있다.
19세기 위대한 전도자 D. L. 무디(Moody)가 멋진 비유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교회와 세상의 올바른 관계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배의 자리는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혹시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올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세상 문화를 외면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옳은 자세가 아니다. 이는 물 밖의 배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경계심을 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라앉는 배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디의 표현을 빌자면, 교회의 자리는 세상 속이며 세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크리스천은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거스르는 자들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믿는 친구들의 눈에는 너무 이방인처럼 보이고 이방인 친구들에게는 너무 크리스천처럼 보인다.”
(중략)
현재의 자리를 새롭게 하라
한번은 한 남자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찾아와 최근에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이제 목숨을 다해 그분을 섬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나 순회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하시는 일이 뭡니까?”
“신발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좋은 신발을
만들어 양심적인 가격에 파세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이미 받은 소명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 소명이 영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혹은 전도에 유용한지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그 일을 계속 열심히 하면 된다. 더 고상한 목표를 품고 현재의 일을 더 훌륭히 해낸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이다.
사람들에게 창조주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로 현재의 자리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0, 24).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각자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셈이다.
오스 기니스에게서도 이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자리가 없어서 이 세상을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미술가나 법률가, 의사, 사업가로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진짜 문제점은 현재의 자리에서 크리스천답게 살지 않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