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아 줄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남녀가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일, 이 얼마나 고귀한 기쁨인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쪽에 가깝지 않은가. 나는 무척 가슴이 쓸쓸한 남자다. 가슴에 살이 별로 붙어 있지 않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분명 무관하다. 가슴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마음 탓이다. 내 가슴속에서는 끊임없이 낙수(落水)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더 이상 동정(童貞)인 채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때부터 내 가슴속의 그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 같다.
간혹 지나가는 연인을 보았을 때, 그 중 다정하고 아름다운 한 쌍을 보았을 때 내 가슴속의 낙수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옆자리에서 술을 나눠 마시고 있는 다정한 연인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진다. 그럴 때 술을 더 마시는 것은 금물이다. 내가 방금 소주 반 병만 마시고 포장마차를 나선 것은 그 이유다. 내 옆자리의 한 쌍은 더없이 다정해 보였다. 그런데 그 한 쌍이 다정해 보이는 것은 둘의 궁합이 잘 맞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여자 쪽의 얼굴이 온화해서 그럴 것이라는 별스런 질투가 다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보다 더 온화한 여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아니, 그것을 온화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까. 아무튼 부드러운 바람결 같은 느낌이 드는 얼굴. 지영. 나는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 p.9-10
나는 벗어 놓았던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별난 종자니까."
나는 옷을 다 입고서 또 말했다.
"이상(李箱)알아? 금홍이란 창녀와 살았던."
그녀는 또 살포시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참, 이건 맛있는거 사 먹어."
나는 텔레비전 위에 놓여 있던 4만 원 가운데 3만 원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만 원은 그녀의 작은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그만 갈게. 잘 있어."
나는 마음의 미련을 억지로 누르며 그녀의 방을 나섰다. 그녀와 첫 만남은 그런 모양의 것이었으며, 나는 그 뒤로도 한 달하고 며칠 더 되는 사이에 네 번이나 그녀의 방에 드나 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의 빈 가슴에 입을 맞춰주었고, 나는 솔직히 그때마다 살아 있는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손에 건네 주어야 하는 6만 원의 화대는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억만금을 주고도 얻기 어려울 평화를 내게 선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 p.55
그날 나는 그녀의 방에서 나와 100여 미터쯤 걷다가 되돌아서고 말았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가슴 벅찬 정사를 나눈 지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웬일인지 못 견디게 그녀가 그리워진 것이었다.
내 주머니에는 마침 돈이 6만 원 이상 더 들어 있었고, 나는 그 돈으로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차지하고 싶어진 것이었다. 정사가 아니라도 좋았다. 30∼40분 정도라도 그녀를 안은 채, 그리고 그녀에게 안긴 채 잠들어 있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또 들어가면 안 될까?' 하고 물었더니, '낭비하지 말고 그만 가세요.' 타이르듯이 말하고는 예의 그 부드러운 바람결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에 복종하기로 하고, 그 대신에 골목 건너 구멍가게에서 블랙로즈 초콜릿을 사다가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나는 발길을 돌렸는데, 초콜릿을 받아든 순간 그녀의 모습은 더 없는 행복감으로 충만해 있었던 듯하다.
--- p.229-230
1장 --- '남녀가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일, 이 얼마나 고귀한 기쁨인가.'
8장 --- 사랑하는 여인을 강한 자가 가로채 가는 데도 그저 멍청히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 약자의 슬픔.
16장 --- 슬픈 기억을 입 밖으로 되살려내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화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