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가 남긴 신화를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의 탁월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육을 맛있게 먹는 거인, 음침한 동굴 속에서의 암담한 운명, 탈출하기 위한 기막힌 전략을 생각해보라. 이야기 속에 달콤한 그리스 포도주를 집어넣은 것은 분명히 이 이야기가 심포시온에서 낭송되기 적합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공식 연회용 그릇을 장식할 때 그리스 화가들이 고객들에게 바로 이 신화를 그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곰브리치가 지적한 대로 그리스 미술가가 신화 구연에 적극 가담한 근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 신화의 속성 때문이었다. 호메로스와 당시 그리스 문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한 것과 다른 신화 서술 방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집트나 근동에도 자체 신화가 있었지만 길가메시(Gilgamesh) 신화에 잘 나타나 있듯이 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 위주였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이와는 다른 방향에 관심이 있었다. 즉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호메로스는 목소리 흉내내기를 즐겼고, 직접 인용구를 만들어내며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집약시키려 했다. 예를 들어 폴리페모스 신화에서도 애정 어린 장면을 연출해냈다. 거인은 오디세우스가 매달려 있는 양을 자기가 제일 아끼는 양을 착각하면서, "언제나 제일 먼저 파릇파릇한 새싹을 베어먹고, 흐르는 시냇가에도 종종걸음으로 제일 먼저 내려가고...그런데 이번엔 네가 마지막이구나. 네 주인님이 다쳐 마음 상하지 않았느냐? 악당 한 놈과 야비한 떨거지들에게 당해 눈을 잃었구나"라고 말한다. 사악한 거인조차도 인간화시켜 내는 비애감을 잘 맛볼 수 있다. 분명히 이런 식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들은 미술가들은 이를 곧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미술가들은 이야기를 보다 실감나고 조리있게 그려내고자 노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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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연극의 제도적 정착에 원동력이 되었고, 일단 모델이 개발되자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은 빠르게 이를 수용했다, 아테네 연극에 대한 욕구가 시라쿠사 같은 그리스 식민지 속에서도 강하게 잠재되어 있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스 극장 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예의 일부는 시칠리아에 있다(시라쿠스의 극장에 있는 의자는 자연 암반을 직접 깎아낸 것이다.) 당연히 서부 그리스 식민지에서 제작된 도기화에는 연극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아테네의 도기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기원전 5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에 걸쳐 쇠퇴했다. 그러나 서부 식민지에서는 미술이 꾸준히 번창했는데, 무덤 안에 도기를 부장하는 이 지역 특유의 관습으로 수요가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의 숭배는 춤, 음주, 해방감을 강조하기 때문에 매우 현세적인 종교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장례 의식에서도 중요했다. 이는 디오니소스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부활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마치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처럼) 갈기갈기 찢겨 죽지만 다시 몸을 재결합해 살아난다. 에우리피데스의 극 <바코스의 여신도들>은 디오니소스에 대한 광신적인 신앙과 이 신앙의 대중적 설득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는 땅 속에서 솓아오르는 듯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신비로움이다. 따라서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다양한 역할 가운데 하나 혹은 몇가지 정도를 발휘한다면, 무덤 부장용 도기 속의 이미지들 속에 부조화란 있을 수 없다.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도기 화가들은 꾸준하게 연극의 장면을 장식으로 이용했다.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단편으로만 전해오는 희곡의 경우, 도기화에 남아 있는 광범위한 정보는 대단히 중요해 그리스 연극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크게 확대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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