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부장님 시외전화예요.” “시외전화? 나한테?” “강원도 횡성군청이래요. 당발이 박 계장이라면 안대나요. 그 사람 되게 웃겨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상황 설명을 다 하는 거 있죠. 하도 빨빨거리고 다녀서 마당발이라나요. 나 원 참. 아침부터 썰렁해지네 이거.” 요즘 들어 부쩍 썰렁이라는 어휘를 말끝에 늘 달고 다니는 행정실 김 양이 은근히 빕더서며 능갈쳐댔다. “전화 바꿨습니다.” “나 당발이 박문호다. 니 개똥쇠 진영이 맞제. 야! 인간아, 니 고향과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졌냐 응? 어떻게 생겨먹은 화상이 그리 무심하냐. 도대체 니 고향에 댕겨간 지 언제고 응?” “문호 니 여전하구만. 삼십 년도 훨씬 넘었는데 내 별명은 여전히 꿰구 있구먼. 그거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된 거 같구만. 야, 이거 얼마 만이냐 문호야. 한 삼십 년 됐냐. 우리 서로 못 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구나.” ‘개똥쇠!’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내 어릴 적 별명이다. 남들은 어릴 적 별명을 떠올리면 고향 생각이 나고 동심이 떠올려지고 어쩌구 한다지만, 나는 삼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개똥쇠의 개똥자만 나와도 열이 뻗치며 치욕스러움에 똥 먹은 얼굴이 됐다. “이 인간아, 삼십 년이 뭐냐 삼십 년이. 우리 초등학교 졸업한 지 삼십오 년째야. 삼십- 오-년.” “벌써 그리됐냐? 삼십오 년이나 됐어? 초등학교 졸업한 지. 참 빠르다 그치, 세월이 말야. 그건 그렇고 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 옛날부터 원체 빨빨거려대던 스타일이었으니 오죽 잘 할까마는.” “야, 말두 마라. 내 옛날 성질 지금은 다 죽었다. 구조조정인지 지랄인지 때문에 요즘 정말 죽을 맛이다. 애새끼들 공부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표 내고 내뛰고 싶은데 먹고사는 게 뭔지 그러지도 못하고 빌붙어 있자니 오죽 하겠냐. 군청 200명 직원 중에 내가 열 번째 왕 고참이야. 나이가 말야. 큰 아들 대학이나 졸업하고 짤려야 할 텐데 말야.” “짜식 죽는 소리 그만 해. 그래도 느들은 철밥통 아냐.” “객쩍은 노가린 그만 까라 이 화상아. 그러나 저러나 진영이 니는 교감 다 돼 가제. 신문 보니 노털들 다 나가고 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교감 하십쇼 하겠던데 안 그러냐?” “그런 소리 하덜 말어. 교감 승진이 누구 말마따나 고스톱 쳐서 되는 줄 아냐? 야 승진 얘기만 해도 나 밥맛없다. 나 교포 되기로 했다. 마음 비웠어, 길고 오래 살기로. 니 교포가 뭔 줄이나 아냐? 교감 승진포기 선생이란 뜻이야. 그래도 교직사회에선 교포가 가장 끗발이 쎄단다. 일단 교포로 맘 굳히면 세상 겁나는 게 없어.” “어쭈 군량골 꽁생원이 인천 가 짠물 좀 먹었다고 이거 막가파 다 됐네. 야, 그래도 니는 우리 수하 초등학교 25회 호프인데 막가면 되겠냐. 니 신춘문옌지 뭔지 당선돼서 소설가 됐다고 했을 때, 우리 초등학교 동기들이 얼매나 모가지에 힘주고 으시댔는 줄 아니 임마. 그때 우리 초등학교 교문에 우리 동창들이 니 당선 된 거 축하한다고 현수막까지 걸고 니를 기다렸는데 니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그때 우리가 얼매나 실망 한 줄 아냐? 좁쌀 동창 몇 놈은 니 욕을 얼마나 한 줄 아니? 시건방진 녀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