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주로 가설적 역사를 다루는 대체역사소설을 쓰다가 최근에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통역사소설에 주력하고 있다. 역사에 흔적이 조밀하게 남아있는 소재도 즐겨 다루지만, 빈약한 기술 한두 줄만 사료로 남아있는 소재도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역사의 내막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가능하면 교훈도 얻을 수 있게 하는 역사 스토리텔링 작업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동안 펴낸 작품으로는 『대군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이방원도 자주 하륜을 찾아왔다. 애당초 이방원이 교류할 만한 인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들 이성계에 줄을 대었으면 대었지 그의 장남도 아닌 오남에게 접근하는 인사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인사가 소수나마 있긴 했지만 이방원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새삼 이방원에게 다가온 자들은 이성계와 직접 연을 맺을 수가 없다보니 이방원이라도 어떻게 구워삶아 권세의 콩고물을 얻어 먹고자 하는 어중이떠중이였다. 이방원과 마주앉아 그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하륜뿐이었다. 이방원에게 패왕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의 영향도 있었다. --- p.46
“권력이란 오만한 계집과 같습니다. 사내 하나에게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권력이란 계집은 강한 사내를 원합니다. 강한 사내를 얻기 위해 복수의 사내들이 저를 두고 칼부림하길 바라지요. 천하절색인 그 계집의 유혹을 받은 자는 반드시 싸움에 뛰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설사 유혹을 견뎌냈다 하더라도 강함을 뽐내려는 다른 사내들의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면 저를 도울 겁니까?” 이는 분명 하륜이 여러 차례 밝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불안한 마음에 재차 하륜의 충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 pp.49-50
이숙번이 살기등등하게 칼을 치켜들었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정도전의 경동맥을 향하고 있었다. “염왕아, 아까운 나의 넋이 오늘 너에게로 간다!” 한 맺힌 절규에 가까운 사자후를 끝으로 정도전은 생을 마감했다. 이숙번의 칼이 그를 두 동강 냈다. 번쩍, 눈앞에서 번개가 치더니 그대로 암흑이었다. 아…….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도전이 죽었다. 이것은 하륜의 제1 목표였다. 그 목표를 방금 달성했다. 덩실덩실 춤사위나 한판 벌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를 지배한 것은 슬픔이었다. 눈물을 한 됫박 쏟아내면 씻어질 그런 것이 아니라 가슴에 평생의 멍으로 남을 슬픔이었다. 하륜은 눈물조차 잊고 정도전의 피가 스며든 마당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 p.166
‘역신 정도전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누군가가 하륜의 속도 모르고 제멋대로 휘갈긴 글자들이 잔뜩 곤고해진 하륜의 속을 예리한 작살처럼 사정없이 마구 찔렀다. 내장이 찔린 듯한 아픔이 싸하게 올라왔다. 하륜은 극심한 고통에 대응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서 그 고통의 습격을 당했다. 하륜이 눈뜬 송장처럼 미동도 하지 않자 신몽인이 조심스레 여쭈었다. “대감마님요, 어느 종류의 벽봅니꺼? 잡놈들의 획책입니꺼, 그기 아이면 백성들의 절실한 목소립니꺼.” 하륜은 전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너도 결국 정도전과 똑같다, 하는 조선 백성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 p.209
사랑채에 따라 들어오는 부인을 돌아보며 하륜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야겠어요. 나는 지쳤어요.” 이 말에 이규연은 전연 놀라는 기색이 없이 잇바디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십니까.” “관둔다는 말이 그리도 좋으십니까?” “그럼요. 이젠 쉬실 수 있잖아요.” 그녀는 한참을 아이처럼 웃었다. 하륜도 유쾌하게 따라 웃었다. “언제 사직서를 내실 생각입니까?” 하륜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 발로는 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