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들 바다새는 군거성이면서 영토 중심적이다. 현대의 많은 도시 생활자처럼 말이다. 우리의 높디 높은 아파트들은 어떤 점에서는 경사가 가파른 바닷가 절벽을 닮았다. 그리고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인구는 어떤 점에서 조밀하게 모여 사는 바다새의 서식지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새들이 이렇게 밀집해 사는 것은 적으로부터의 보호 수단이 되는데, 이것 역시 수많은 아파트 주민이 상호 안전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둘 다 군거적이며(많은 수가 모여 산다), 영토중심적(방어할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한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극단을 피하고 서식지와 영토 두 경우의 조화를 갈망한다. 문화에 따라 비율은 다르겠지만, 진정한 인간의 실존은 둘 다 포함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면만으로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우리의 인간다움에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중 문화에 굴복해 버리는 것, 사생활을 전혀 갖지 않는 것,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는 것,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의도하신 독특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는 것이다.
--- pp.65
(...) 잘 알려진 벌새의 또다른 면모는 그들의 비행기술이다. 그들은 환상적인 곡예 비행술을 가지고 있는데 헬리콥터의 비행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놀라운 기술이다. 그들은 위 아래로 날 줄 알고, 전진과 후진, 측면 비행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몸체를 거꾸로 뒤집어 날기도 한다. 또 몸체는 가만히 있으면서도 공중 제비 돌기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의 날개가 퍼덕거리는 속도는 경이롭다. 1초에 평균 25회나 퍼덕거리며, 빨리 날 때는 1초에 80회나 날개짓을 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말이지만, 짝짓기를 할 때는 1초에 200회나 퍼덕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 정도 속도면 곤충들과 비슷하다.(...)
벌새는 낮 동안 영양분을 얻기 위해 막대한 양의 꿀과 단백질 공급원인 작은 곤충과 거미를 쉴새없이 먹는다. 그들은 거의 쉬지 않는다. 먹이 모으기가 그들의 주된 일인 것이다. 그들은 에너지를 다시 축적하기 위해서 먹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에너지를 더욱 소모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쉴새없이 날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소모하기도 하는 그 먹는 과정 때문에 악순환 속에 있는 셈이다. 그들에겐 음식물 섭취가 생존의 대사(大事)이다.
우리 인간은 미치도록 먹어대는 벌새의 식사 습관과는 두 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첫째, 우리는 먹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2). 동시에 우리는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고행자가 되서는 안된다. 고행자는 물질을 경멸하고 금욕적 생활을 하는 근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질서를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딤전 4:3-5 ; 6:17). 그러므로 우리가 식물을 즐기고 그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온당하기 그지없다. 문화권마다 식사 시간이 다르고, 사라믇ㄹ은 기근이 닥쳤을 때는 하루 한 끼의 식사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는다. 그러나 식량이 풍부할 때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고, 그 식량을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한다.
인간과 벌새가 두 번째로 다른 점은, 사람의 경우 먹는 일 자체는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강건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본다. 우리는 연료를 공급받기 위해 먹을 뿐이지, 계속 먹기 위한 에너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먹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할 힘을 얻기 위해서 먹는다.
![](http://image.yes24.com/files/292954.jpg)
교황의 "인간 노동에 대한 회람"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교회는 창세기의 첫 페이지에서, 노동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차원임을 확신하는 근거를 발견한다"(13항). "일은 인간에게 좋은 것인다. 일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한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을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변혁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오나성된 모습에 이르고, 실로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인간다워진다'"(40항). "인간의 삶은 매일 일을 통해 세워지며, 그 일에서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이 생겨난다"(3항). 이 존엄성은 자연을 변혁시키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의식적인 특권이다.
--- pp.48~50
(...) 잘 알려진 벌새의 또다른 면모는 그들의 비행기술이다. 그들은 환상적인 곡예 비행술을 가지고 있는데 헬리콥터의 비행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놀라운 기술이다. 그들은 위 아래로 날 줄 알고, 전진과 후진, 측면 비행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몸체를 거꾸로 뒤집어 날기도 한다. 또 몸체는 가만히 있으면서도 공중 제비 돌기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의 날개가 퍼덕거리는 속도는 경이롭다. 1초에 평균 25회나 퍼덕거리며, 빨리 날 때는 1초에 80회나 날개짓을 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말이지만, 짝짓기를 할 때는 1초에 200회나 퍼덕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 정도 속도면 곤충들과 비슷하다.(...)
벌새는 낮 동안 영양분을 얻기 위해 막대한 양의 꿀과 단백질 공급원인 작은 곤충과 거미를 쉴새없이 먹는다. 그들은 거의 쉬지 않는다. 먹이 모으기가 그들의 주된 일인 것이다. 그들은 에너지를 다시 축적하기 위해서 먹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에너지를 더욱 소모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쉴새없이 날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소모하기도 하는 그 먹는 과정 때문에 악순환 속에 있는 셈이다. 그들에겐 음식물 섭취가 생존의 대사(大事)이다.
우리 인간은 미치도록 먹어대는 벌새의 식사 습관과는 두 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첫째, 우리는 먹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1-32). 동시에 우리는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고행자가 되서는 안된다. 고행자는 물질을 경멸하고 금욕적 생활을 하는 근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질서를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딤전 4:3-5 ; 6:17). 그러므로 우리가 식물을 즐기고 그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온당하기 그지없다. 문화권마다 식사 시간이 다르고, 사라믇ㄹ은 기근이 닥쳤을 때는 하루 한 끼의 식사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는다. 그러나 식량이 풍부할 때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고, 그 식량을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한다.
인간과 벌새가 두 번째로 다른 점은, 사람의 경우 먹는 일 자체는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더 고상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강건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본다. 우리는 연료를 공급받기 위해 먹을 뿐이지, 계속 먹기 위한 에너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먹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할 힘을 얻기 위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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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인간 노동에 대한 회람"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교회는 창세기의 첫 페이지에서, 노동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차원임을 확신하는 근거를 발견한다"(13항). "일은 인간에게 좋은 것인다. 일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한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을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변혁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오나성된 모습에 이르고, 실로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인간다워진다'"(40항). "인간의 삶은 매일 일을 통해 세워지며, 그 일에서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이 생겨난다"(3항). 이 존엄성은 자연을 변혁시키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의식적인 특권이다.
--- pp.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