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 : 안녕, 홀든. 정말 반갑구나. 얼마 전 < 호밀 밭의 파수꾼>이란 책을 읽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단다. 이렇게 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돼 기쁘구나.
홀든 : 선재야, 만나서 반갑다. 내 책에 '정말 사람 혼 빠지게 하는 책은 어떤 거냐면요, 다 읽고 났을 때 그 책 작가가 우리 친구와 잘 아는 사이여서 언제든지 전화를 걸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책' 이라고 썼는데, 네가 주인공으로 나온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일고 꼭 그런 느낌이 들더구나.
--- p.34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은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디포의 작품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혈기왕성한 사내가 자신의 육체적 욕구,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적 욕구를 어떻게 충족했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청교도였던 디포가 로빈슨의 경건함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슬픔과 절망의 세월 동안 그 불쌍한 사내가 무엇으로 위로 받고 어디에 희망을 걸었는지 조금도 암시해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 작가는, 섬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돼 로빈슨이 여자를 안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물론, 고도에서 여성과의 결합은 불가능했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로빈슨은 목가적인 피난처를 광적인 에로티시즘의 사원으로 만들었다. 디포의 모험이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투쟁을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의 성적 모험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절해고도에서 여자와의 관계는 이뤄질 수 없었지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수없이 널려 있었다. 나무 줄기에 패인 구멍이나 길들인 야생동물들은 훌륭한 성적 파트너였다(...) 프라이데이와의 만남이 원작의 의미와 얼마나 다른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프라이데이에게 로빈슨이 생명의 구세주였다면(이것은 디포의 시각이다), 로빈슨에게 프라이데이는 성적 욕망의 구세주(이것은 리처드슨의 새로운 시각이다)였다.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이, 원작자가 세계관의 한계 때문에 괄호 속에 남겨 놓은 부분에 대한 메꿔쓰기라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작자의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토대로 한 거꾸로 쓰기의 전형이다. 구조주의적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디포의 세계와는 반대로 자연이 문화를 지배하고,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프랑스식 발음)가 오히려 로빈슨을 가르치고 원시성이 문명을 이긴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실로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아닐 수 없다.
--- pp 19~21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은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디포의 작품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혈기왕성한 사내가 자신의 육체적 욕구,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적 욕구를 어떻게 충족했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청교도였던 디포가 로빈슨의 경건함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슬픔과 절망의 세월 동안 그 불쌍한 사내가 무엇으로 위로 받고 어디에 희망을 걸었는지 조금도 암시해주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 작가는, 섬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돼 로빈슨이 여자를 안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물론, 고도에서 여성과의 결합은 불가능했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로빈슨은 목가적인 피난처를 광적인 에로티시즘의 사원으로 만들었다. 디포의 모험이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투쟁을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의 성적 모험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절해고도에서 여자와의 관계는 이뤄질 수 없었지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수없이 널려 있었다. 나무 줄기에 패인 구멍이나 길들인 야생동물들은 훌륭한 성적 파트너였다(...) 프라이데이와의 만남이 원작의 의미와 얼마나 다른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프라이데이에게 로빈슨이 생명의 구세주였다면(이것은 디포의 시각이다), 로빈슨에게 프라이데이는 성적 욕망의 구세주(이것은 리처드슨의 새로운 시각이다)였다.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이, 원작자가 세계관의 한계 때문에 괄호 속에 남겨 놓은 부분에 대한 메꿔쓰기라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작자의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토대로 한 거꾸로 쓰기의 전형이다. 구조주의적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디포의 세계와는 반대로 자연이 문화를 지배하고,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프랑스식 발음)가 오히려 로빈슨을 가르치고 원시성이 문명을 이긴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실로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아닐 수 없다.
--- pp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