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해설
비루한 현실을 이겨내는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그 비정하고도 추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일이다. 추악하고 괴기스러운 눈앞의 풍광에 눈동자가 꺾이거나 끝내 눈이 멀어버릴지라도 가감 없는 현실의 응시야말로, 자신이 딛고 있는 이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역사는 곧이곧대로, 혹은 정의로운 선택만을 행하지는 않는다. 근시안으로 보면 때때로 역사 또한 후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미래의 청사진만을 줌인(zoom in)하여 대형 스크린에 띄우기만 하는 얼치기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가 이 추악한 인간의 이야기들 속에서 무언가 건져내려고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니 낯부끄러운 과거의 자화상일지라도 현재를 향해 달려왔던 또 다른 우리들의 민낯을 복기하면서 공(功) 과(過)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외면해버렸던 진실들 때문에 진창의 구렁 속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정신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목소리는 거대한 폭거에 시달리고 절망하면서도 끝내 삼킬 수 없었던 영혼의 메아리다. 시는 그런 목소리의 생생한 문학적 증거다. 시인은 세계가 올바로 놓여 있어야 할 자리를 선취해서 보여주는 사람이다. 임윤은 이번 시집에서 지금 이곳의 삶의 현장에서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어떤 거대한 죄악의 얼굴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위정자들의 터무니없는 경제 논리로 점점 죽어가는 이 땅과 바다의 속살을 그려낸다. 그 필치는 서늘하면서 날카롭다. 그에게 아쉬운 것은 세계와 인간이 한데 어우러지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해 공동체이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지옥도와도 같은 현실과 고독한 실존이 해답을 상실한 채 떠도는 현재의 공간이다. 이는 시인을 둘러싼 세계와, 그 검은 세계에 가린 채 한껏 부풀어 올랐을 쓸쓸함의 거처이기도 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핵 발전소의 위험을 고발하는 시와 시인이 몸담고 있는 지역의 생태를 더듬는 시로, 후자의 경우 일련의 여행 시와 일상의 감성을 드러낸 시로 드러난다.
임윤의 시가 결국 상처를 응시하고 이를 따스한 온기로 보듬는 데로 나아가는 방향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그린 점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돌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시도 맹랑한 말장난에 그치기 때문이다. 요원하기만 한 현실의 아포리아는 시적 언어에 고스란히 각인된다. 그런데 시 속에 각인된 현실의 풍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인이라는 실존적 개인의 내면이 모자이크된 결과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개인과 세계가 결코 따로 떨어져서 놓일 수 없다는 인식의 경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일은 있어도 내면에 빠져버려 우주적 청맹과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그런 위험에 대해 늘 경계하려 한다. 그가 일상에서 보고 겪게 되는 사소한 경험조차 우리 시대의 단면을 짐작하게 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하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서정이 죽어버린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가”(「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라는 독백에서도 보듯이, 서정의 죽음을 딛고 꼿꼿이 일어서는 새로운 시적 감성은 시인의 몫일 수밖에 없다. 불온한 현실의 뿌리에 낙원의 유전자가 있었기에 우리는 세상을 개탄하는 마음의 결에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점치게 된다. 우선 죽어버린 서정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데서 그것은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임윤의 시는 세상의 온갖 죽음과 눈물과 탄식을 끌어모아서 이들을 달래고 한바탕 굿을 벌이는 진혼굿이 아닐까. 더러 황폐한 들판에서도 장미는 피듯이, 진창의 세상에서도 진실의 가치는 녹슬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은 시로써 증거하는 듯하다. 꽁꽁 얼어버린 우리 시대의 꽃은 해빙의 날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직은 얼어버리지 않았고, 더욱이 꽃이라고 할 만한 가치도 실종된 듯한 현실에서 시는 무엇을 애타게 부르고 있을까. 모든 언어가 결빙된 자리에서 피는 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의 꽃이리라. 시인은 그 꽃의 속살을 미리 만지며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것이다. 자, 어떤 자리에서 시작할 것인가.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가 제기하는 물음이다.
―정훈(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시인의 말
푸른빛이 붉은 파도를 앞세워 밀려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참과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던 거짓 사이에서
나는 명제를 부정했다.
1+1=3이라는 논리는 눈으로 봐도 거짓이라는 걸 알기에
늦었지만 이제 명제라 결론 내린다.
명제의 부정이나 부정의 명제가 도처에서 활개치고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진실을 숨긴 거짓들이 난무한 현실
외줄 타듯 위태로운 생의 길목에서
아직 혼돈에 빠져 흐느적거린다.
탈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나의 시력은 어두워지고
그림자는 긴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멀리 도망쳤다 생각하고 뒤돌아보면
아직 그 자리에 맴돌고 있는 나의 발자국들
오늘도 몽유병자처럼 선잠을 더듬거린다.
■ 추천의 글
임윤 시인의 시는 시 쓰기란 무엇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의 시적 관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뿌리 뽑힌 자, 추방된 자, 떠도는 자, 돌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시선이 쏠려 있고, 그들과 기꺼이 동행하려 한다. 그는 또 동토의 시베리아, 우랄, 우수리스크, 사할린, 발해의 땅, 그 이산의 슬픔이 서린 곳에서 아픈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삶의 터전을 밀어내고 들어선 핵 발전소의 가공할 공포를 정면으로 대면한다. 이주 노동자, 하층계급, 여전히 국경을 떠도는 유민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외부 세계에 열려 있고, 스스로 타자 되기가 그의 시 쓰기이다. 인간적 유대의 결핍과 나르시시즘적 자기 과잉의 우울한 내면에 공전하는 시들이 대세인 시대에 그의 시는 고전적이라고 할 만큼 타자에 충실하고 세계에 정직하게 대응한다. 이것은 현과 울림통처럼 시인의 내면세계와 조응하면서 서정의 지평은 맥놀이처럼 확장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책을 덮은 다음에 울림이 더 진하게 전해온다.
- 백무산(시인)
임윤은 시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는 강한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인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핵 발전소 문제를 통해 “피부가 벗겨지며 서서히 죽어간 소방관들을 보”거나 수평선을 떠돌던 “오징어 집어등이 미라처럼 마르고”, 집들이 “푸른빛에 휩싸여 허물어지고” “기형은 또 다른 기형”을 낳아 “아이들 모습도 천천히 변해”서 “얼굴 없는 시대가 펼쳐졌다”고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송전탑의 유해성, 지역 축제에 대한 무모성, 문화유산을 둔 지역민과의 갈등, 펄프 공장의 악취 등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고난 어린 삶, 남북 분단의 구체적 현실, 실직한 남편과 비정규직 시위대 대열에 있는 비극적 노동 현실, 이주 노동자 문제와 다문화 가정의 갈등 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제재의 채취 역시 북한에서 티베트와 러시아 북양의 해변까지 다양하고 폭넓다. 시는 곧 뜻을 전달한다는 전통적 시의 원리에 충실한 임윤 시의 선명한 주제 의식과 진술 방식은 시인의 호방한 성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난해하고 난잡한 질곡을 헤매고 있는 현재 시단에 던지는 시원한 충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