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밤이 왔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지. 그런데 문득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어. 내 집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파란 대문 집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그런데 조금도 무섭거나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더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오히려 아늑한 기분이 드는 게 참으로 이상했지.'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의 오렌지빛 나트륨등에 불이 나갔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그러다 나는 처마 밑에 앉아 깜박 잠이 들어버렸어. 한참 후에 누군가 등에 두드려 나는 잠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나를 깨운 사람은 놀랍게도 어머니였어. 밤늦게까지 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돼서 나를 찾으러 밖으로 나온 거야. 더 놀라운 것은 그 파란 대문 집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는 사실이야.'
--- p.268
'여자에 대해 무지하다니 한 가지만 알려주죠. 연우씨가 보기엔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곧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나예요. 그러니 그 중에서 고르려 하지 말아요. 거꾸로 연우씨가 그들에게 선택될 수도 있어요. 앞으로 만약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고맙게 여기란 뜻이에요. 상대나 자신 둘 다에게 말예요.'
--- p.26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이겠지만,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와 네 어미도 그랬다. 완전히 지쳤다고 느껴지는 때가 올 거다. 그땐 세상의 모든 양들이 침묵하고 나무도 한결같이 등을 돌리고 서 있을 거다. 안타깝구나. 그땐 이미 이 아비가 도울 수 없을 때일 테니까. 부디 잘 살기 바란다. 너한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거라.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도 고개 숙이거라. 너는 지금부터 많은 짐을 짊어진 사람이다. 모쪼록 경배하거라. 너를 찾아오는 범죄자조차 성의껏 변호해야 하듯이 말이다.
--- p.139
앞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우린 엄연히 타인이고 어려운 선택 끝에 서로 긴밀히 협조하기 위해 만난거야. 그러니 어떤 순간에 간신히 얻어낸 가슴 떨리는 영상을 굳이 캐물어서 날려버리는 것은 하지 않았으면 해. 그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신들이 잠들어 있는 방의 촛불을 하나씩 꺼버리는 일이야 '
--- p.112
'실망했나요? 하지만 이렇게 무너져 가는 것도 한편 운명이에요. 싱처또한 마찬가지구요. 운명이란 주인의 간곡한 기대조차 번번히 져버리곤 하는 것이더군요.'
그 단정적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린 채 물끄러미 그녀의 이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 이마 한 중간에 날카로운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몰아쳐 오자 그녀는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종업원이 내온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충혈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나이를 먹어도 신기할 정도로 당신은 변하지 않는 군요.'
--- p.279~280
세상은 확실히 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변화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으로 내려올 때는 그 신념이 속수무책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자기 신념을 위해 주변을 희생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자신의 신념조차 때로 가까운 사람들 위해 버릴 수밖에 없을 때 그의 삶은 비록 누추해지더라도 인간적으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가까운 사람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체를 위한 신념이 달성된 경우에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 p.230
삶은 확실히 어떤 기차에 올라타느냐에 따라 운명의 모습이 변하게 마련인가 보다. 중간에 간이역에서 슬쩍 내려버리면 모를까.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사슬처럼 서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을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뼈져리게 깨달았다.
--- p.300
사방에서 꽃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열대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피어 있는 그 환장할 붉은 꽃. 하이비스커스. 급기야 투둑투둑 비가 쏟아지며 바람이 정원 가까이로 거세게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펴 들고 미란이 근무하고 있는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호텔은 집에서 30분 거리로 해변 쪽에 있었다. 야자수 숲이 바람에 무겁게 쓸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황톳물이 튀는 밤길을 걸어 아래로 내려갔다. 언덕을 내려가며 언뜻 뒤를 돌아보니 발코니에 걸려 있는 보라색 등이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 p. 276
"하지만 거기엔 온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잖아요.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매매 관계로 처리하게 되면 막상 할 일도 없어지구요. 하긴 지금은 혼자 있으니 그게 편하긴 하겠죠."
그녀는 내게 드라이클리닝식으로 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역시 아쉽거나 필요한 게 별로 없었다.
촛불을 켜놓고 음악을 오토 리버스 시켜놓고 그녀와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고 침대에 들어가 그날도 사랑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내가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란의 몸은 변함없이 다정다감하고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냄새가 좋았다.
--- p. 121
"아직 있었군요."
"그래, 가지 않았지."
"실망했나요?"
"미안하단 말만 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을 들으려고 기다렸던 건 아니니까."
"화났나요?"
"빗속을 함께 뛰어왔다고 해서 꼭 그래야만 되는 건 아니야. 그게 의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원피스 자락에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종아리와 구두에도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당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그게 섹스를 뜻하는 건 아니야.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그거하고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야. 말하자면 당신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당신의 체온을 통해, 그 흐름의 일부라도 말이야."
--- p. 61
"소나기가 내리고 난 밤이면 저 이태리 식당 정원에 유령이 나타나요. 너무나 밝은 빛을 하고 말이죠. 어둠 속에서 그것은 곧 사라져버릴 듯 보이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거기에 뚜렷이 존재하고 있어요. 이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말예요. 한 번은 가까이 가서 훔쳐보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당신 모습을 닮아 있더군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
"그것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로등이 꺼지듯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어요. 그게 만약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자기 혼령에 이끌려 여기에 왔는지도 몰라요. 새상 한 모퉁이에서 우리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눈사람처럼 생긴 그 맑은 기운, 당신 말예요."
--- p. 195
"하지만 거기엔 온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잖아요.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매매 관계로 처리하게 되면 막상 할 일도 없어지구요. 하긴 지금은 혼자 있으니 그게 편하긴 하겠죠."
그녀는 내게 드라이클리닝식으로 산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역시 아쉽거나 필요한 게 별로 없었다.
촛불을 켜놓고 음악을 오토 리버스 시켜놓고 그녀와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고 침대에 들어가 그날도 사랑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내가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란의 몸은 변함없이 다정다감하고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냄새가 좋았다.
--- p. 121
"아직 있었군요."
"그래, 가지 않았지."
"실망했나요?"
"미안하단 말만 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을 들으려고 기다렸던 건 아니니까."
"화났나요?"
"빗속을 함께 뛰어왔다고 해서 꼭 그래야만 되는 건 아니야. 그게 의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원피스 자락에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종아리와 구두에도 흙탕물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당신의 몸을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그게 섹스를 뜻하는 건 아니야.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그거하고는 뭔가 조금 다른 감정이야. 말하자면 당신이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당신의 체온을 통해, 그 흐름의 일부라도 말이야."
--- p. 61
"소나기가 내리고 난 밤이면 저 이태리 식당 정원에 유령이 나타나요. 너무나 밝은 빛을 하고 말이죠. 어둠 속에서 그것은 곧 사라져버릴 듯 보이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거기에 뚜렷이 존재하고 있어요. 이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말예요. 한 번은 가까이 가서 훔쳐보았죠. 그런데 놀랍게도 당신 모습을 닮아 있더군요.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
"그것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로등이 꺼지듯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어요. 그게 만약 당신이었다면 당신은 자기 혼령에 이끌려 여기에 왔는지도 몰라요. 새상 한 모퉁이에서 우리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눈사람처럼 생긴 그 맑은 기운, 당신 말예요."
--- p. 195
' 지금 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영영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세상엔 그런 일은 없으니까요. 만약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이번만큼은 받아들이겠어요. 제게 한번쯤 상처를 입힌다고 해도 말에요. 하지만 단 한번이에요. 준이 때문이라도 더 이상은 저도 용납하기 힘들어요 '
그리고 아내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덧붙혔다.
'그런데다 저는 이미 당신을 한번 용서 한 적이 있어요'
---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