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의 처연한 미사가 행해졌다……. 황제와 성직자, 그리고 그리스인·라틴인 모두가 이미 패전과 패전 후에 닥쳐올 사태를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슬림 중기병들과 샤를마뉴 대제의 밀집방진 보병들은 생사를 건 싸움에 돌입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랍-무어 기병은 프랑크 전사 외에 또 다른 적과도 싸워야 했다. 바로 중기병의 기동력을 방해한 나무숲이었다.”
“반격에 나선 오스만 제국의 울룩 알리가 도리아 휘하 함대의 측면을 위협하면서 대해로 유인했다. 도리아는 오스만의 전함이 빠르게 접근해 오자 그들의 측면이 공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휘하 전선의 선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이상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투르 전투, 레판토 해전의 일부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 pp.3-4
아랍-무슬림은 투석기는 물론 이동식 탑에 전사를 태워 성을 공격하거나 넘기도 했다. 그들은 투석기 외에도 공성무기·성벽용 사다리·참호와 터널 건설기구 등을 동원했으며, 낙타와 말을 수송력으로 이용해 기동력을 높였다.
그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전장에서 대부분의 경우 낙타에 갑주를 입힌 낙타기병대를 출동시켰다. 기동성이 뛰어나 ‘이동수비병’으로 불린 경기병은 창과 칼로 무장하고 적의 측면이나 후미를 공격했다. 그들은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중무장 보병이나 기병과 달리 경기병 혹은 경기병 궁수를 주력군으로 삼았다. 하지만 732년 투르에서는 중기병이 주력군 역할을 했다. 사실 기병은 말들이 중무장 보병단 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려 할 경우 전략상 차질을 초래하기 쉽지만, 일단 적진 속으로 쇄도하기만 하면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었다. --- p.29
대함대를 동원하고 대구경 대포까지 투입했지만 콘스탄티노플 포위·공격에서 만족할 만한 전과를 거두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메흐메드 2세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새로운 전략을 짰다.
금속체인 때문에 진입 불가능한 금각만 입구를 공략하는 대신 금각만 북쪽의 보스포루스 해협, 즉 제노바 통제 아래 있던 갈라타에서 작은 전선들을 육지로 끌어올려 반대편인 남쪽의 금각만 내부로 들어가게 하려는 우회작전이었다. 메흐메드는 1.6킬로미터에 달하는 갈라타와 금각만 사이의 언덕에 통나무 레일을 깔게 했다. 소형이지만 무거운 갤리선을 육지로 끌어올린 다음, 반대편 금각만 안으로 옮기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4월 22일 경마용 말들을 이용하여 소형 갤리선들을 육지로 끌어올리게 했다. 말하자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갈라타 부근에 집결한 80여 척의 오스만 전선은 뭍으로 올라온 다음 통나무 레일을 타고 갈라타와 금각만 사이를 지나 금각만 내부로 들어갔다. 참으로 대담하고도 기발한 전략이었다.
비잔틴 제국이 전력을 다해 금각만 입구에 설치한 금속 체인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금각만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비잔틴 전선들도 별다른 구실을 할 수 없게 됐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이 작전은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금과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프랑스-독일 국경에 건설했던(1927~1936) ‘마지노선’이 히틀러의 벨기에 작전으로 무용지물이 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 pp.108-109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은 인적·물적으로 크나큰 손실을 입었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병사가 1만 5,000명(혹은 2만 5,000명)에 달했고 3,500여 명의 병사는 포로로 잡혔다. 전선도 갤리선 117척을 포함해 210척을 잃었는데, 그중 130척은 신성동맹군에 나포되었다. 승리한 신성동맹 측도 튀르크-이슬람 측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병사·선원·노잡이 등 모두 7,500(또는 1만 3,000~1만 5,000)여 명이 전사했고, 8,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신성동맹군은 그만한 숫자의 기독교 노예(약 1만 5,000명)를 해방시켰다. 신성동맹 측도 12척(혹은 50여 척)의 갤리선을 잃었다.
신성동맹 측의 부상병 중에는 스페인 출신 세르반테스도 있었다. 스물넷의 나이로 레판토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세르반테스는 전쟁이 신성동맹 측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자 이 해전을 두고 “과거나 현재의 사람들이 보았고 미래의 사람들도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를 가장 고귀한 순간”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 가슴과 왼손에 부상을 입어 평생 왼손을 못 쓰게 되었으며 스페인으로 귀국하던 중 자칫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귀국선이 난파하여 형 로드리고와 함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으나 먼저 풀려난 형이 금화 500에스쿠도의 석방금을 지불해 감금 5년만인 1580년에 그는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르반테스는 훗날 명작 『돈키호테』를 집필할 수 있었다.
--- pp.15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