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인들은 클로비스 훨씬 전에, 아마도 실제로는 프랑크 족이 생겨 나기도 전에 갈리아에 많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아그리우스 왕국의 정복은 이러한 상황을 촉발시킨 요인인 동시에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반응일지도 모른다. 어떤 프랑크 인들은 한 번에 몇 가족씩 그리고 몇 킬로미터씩 로마 세계로 이주하였다. 라이티로든 동맹군으로든 로마 세계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서서히 '프랑크 인'이 되어 갔다. 문자로 된 증거물이 부족한 상태에서 북유럽의 그러한 지역들이 어떻게 '프랑크화' 되었는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최선의 증거물로 2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줄지어 세워진 묘지들을 들 수 있다.
--- p.145
콜룸바누스가 프랑크 귀족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 갈리아-로마 문화의 표현도 아니고, 주교의 창조물도 아닌, 엄격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독특한 형식의 기독교가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세속의 세계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부 프랑키아에서 강력한 집안들과 밀접한 관게를 유지하고 있던 성인(콜룸바누스)이 보급하였다. 그는 특히 네우스트리아 궁정의 귀족들과 좋은 관게를 유지했다. 수자 태생으로, 보비오에서 창서자인 콜룸바누스의 뒤를 이은 2대 수도원장 아래 수사생활을 했던 요나스Jonas가 기록한 콜룸바누스의 성인전에 그러한 관계가 잘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북부 프랑크 귀족들은 콜룸바누스와 그의 수도원 전통에서 자신들의 사회적ㆍ정치적 지위에 걸맞은 종교적 토대를 발견하여, 그들이 뭉칠 수 있는 공통 분모를 얻었다.
--- p.230
상업적이고 물질적인 로마의 문화가 게르만 사회에 침투하여 미친 영향은 심대했다. 첫째, 화폐가 도입되고 게르만 인의 가축과 가죽, 그리고 아마도 모피와 호박, 노예 등과 같은 여러 상품들을 위한 시장이 확대됨으로써 사회적 분화가 극도로 심화되었다. 로마와 교류가 있기 이전에도 게르만 인들이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는 유토피아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가축 수의 차이는 위계화된 사회 구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르는 가축의 수에 따라 소유 재산이 두 배 내지 세 배 정도로 차이가 날 수 있었다면, 로마에서 들어온 금화와 사치품의 축적으로 인해 벌어진 빈부 차이는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게르만 부족드의 구성원 사이에 빈부 차이가 심해지면서 전통적 지도자의 권력과 위신도 덩달아 크게 증가하였다. 둘째......
--- p.89
로마화가 진행되고 있던 세계 어디에서나 로마의 군대는 존재하였다. 기원전 52년에 베르킹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후 갈리아의 속주들은 제국으로의 통합을 대체로 받아들었고, 심지어 몇몇 속주들은 이를 환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향하여 북쪽과 동쪽으로 나아갈수록,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와 빌라에 비해 카스트라castra, 즉 군사 요새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갈리아의 속주들과는 달리 상ㆍ하 게르마니아는 그곳에 주둔한 사령관이 직접 통치하였다. 이는 라인 강 너머에 사는 사람들, 즉 게르만 인들이 로마 세계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곳에서는 어디에나 군대가 있었다.
--- p.29
「클로비스의 후손들은 그에게 물려받은 전사의 맹렬한 기상을 상실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행이나 결점으로 메로빙거 가문의 마지막 왕들은 '게으름뱅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채 왕위에 올랐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무덤에 묻혔다. 콩피에뉴 근처에 있는 한 시골 궁정이 그들의 거처로 배정되었는데, 그들에게 그곳은 감옥과도 같았다. 그러나 매년 삼월 혹은 오월에 그들은 황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나와 프랑크 인들의 회의 장소로 안내되어,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궁재가 한 일들을 승인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위대한 저서『로마 제국 흥망사』에서 메로빙거 가문의 마지막 왕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p.297
「클로비스의 후손들은 그에게 물려받은 전사의 맹렬한 기상을 상실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행이나 결점으로 메로빙거 가문의 마지막 왕들은 '게으름뱅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채 왕위에 올랐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무덤에 묻혔다. 콩피에뉴 근처에 있는 한 시골 궁정이 그들의 거처로 배정되었는데, 그들에게 그곳은 감옥과도 같았다. 그러나 매년 삼월 혹은 오월에 그들은 황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나와 프랑크 인들의 회의 장소로 안내되어,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궁재가 한 일들을 승인하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위대한 저서『로마 제국 흥망사』에서 메로빙거 가문의 마지막 왕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