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년에 프랑크 동부지역 마인 강 유역에 있는 마인가우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779)에 프랑크 왕국에서 최고의 학문 중심지 중의 하나로 알려진 풀다 수도원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 대수도원의 제2대 원장인 바우골프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수도원 학교에서 충분한 기초 소양을 갖추자 그 수도원의 원장은 아인하르트가 샤를마뉴의 궁정학교로 갈 수 있도록 알선해 주었다.
수도원장의 소개로 아인하르트는 791년(21세)에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궁정학교에 입학했다. 샤를마뉴는 치세 초기에 주변의 학자들을 모아 궁정학교를 설립한 후 영국에서 앨퀸이라는 유명한 고전 학자를 초빙하여 교장 자리에 앉혔다. 아인하르트는 궁정학교에 들어가서도 학문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곧 앨퀸과 샤를마뉴의 눈에 띄게 되었다. 아인하르트는 문학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건축, 미술, 기술 분야에 대해서까지도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곧 샤를마뉴의 신임을 받아 왕의 친구이자 고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탁월한 인물로 명성을 날렸다는 것은 이 책의 서문을 쓴 발라프리트 슈트라보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슈트라보는 아인하르트가 당시의 모든 궁정 관리들 중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고 극찬하고 있다. 그는 아인하르트가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나무랄 데 없는 성품까지 겸비하고 있다고 높이 평했다. 아인하르트는 샤를마뉴보다 28세나 어렸지만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샤를마뉴는 그에게 사생활에 대한 비밀까지도 허심탄회하게 토로할 정도로 둘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샤를마뉴가 사망한 뒤에 아인하르트는 다시 샤를마뉴의 아들 루이 경건왕에게서도 깊은 총애를 받았다. 그는 루이 치하인 814년부터 830년까지 카롤링거 제국의 고위직을 두루 담당했다. 루이는 아인하르트에게 제국 내에 있는 여러 대수도원의 책임을 맡겼다. 루이 왕이 즉위한 직후에 그는 보름스의 주교인 베른하르트(Bernhard)의 누이와 결혼했다. 결혼한 그에게 루이 왕이 여러 대수도원을 관할하는 대수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은 그를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아인하르트는 약관 20대부터 샤를마뉴와 두터운 우의를 맺었으며, 샤를마뉴의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샤를마뉴 사후에 그의 아들로부터는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렇게 한 사람이 2대 황제에 걸쳐 신임을 받은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 아인하르트가 이렇게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인품과 역량 때문이었다.
『샤를마뉴의 생애』 외에도 아인하르트의 저술로 몇 편이 더 전해지고 있다. 먼저 71편의 서한들을 모아놓은 책으로 『아인하르트의 서한들(Einharti Epistolae)』이 있다. 이 책은 814년부터 840년까지 아인하르트가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놓은 서한집이다. 그리고 아인하르트의 종교 관련 저술로는 『성 마르켈리누스와 베드로의 유해 이송과 기적들(De translatione et miraculis sanctorum suorum Marcellini et Petri)』, 『순교자 마르켈리누스와 베드로의 수난(Passio martyrum Marcellini et Petri)』, 『십자가 숭배에 관한 소책자(Libellus de adoranda Cruce)』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그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이 더 있지만 그 진위가 불확실하다.
일찍이 1989년에 아인하르트의 이 책을 분석해 한 편의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아인하르트의 Vita Caroli에 관하여>(<전북사학> 제11·12합집, 1989)]. 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이미 아인하르트의 ≪Vita Caroli≫ 전체를 읽고 비판적으로 분석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번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옮긴이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주제로 설정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다. 이 주제는 내용상으로 샤를마뉴의 부친인 피핀으로부터 샤를마뉴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 샤를마뉴 전기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옮긴이는 그동안 서양 중세의 정치사상사 분야를 주로 연구해 왔다. 특히 교황권과 황제권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중점적『꿰뚫는 논술 교과서』(공저: 신서원, 2003), 『만화 한국사·세계사 척척 논술』(공저: 중앙재능북스, 2006) 등의 저서와 역서 『중세 이야기』(공역: 새물결, 2003), 그리고 논문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 중심으로」(「서양중세사연구」 제8집, 2001), 「스테파누스 2세와 피핀의 상봉: 그 역사적 의미」(「서양중세사연구」 제9집, 2002),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 목적」, (「서양중세사연구」 제11호, 2003),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하여」(「서양중세사연구」 제13호, 2004),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 시기」(「서양중세사연구」 제14호, 2004), 「신성로마제국의 성격: 교황권과 황제권의 관계를 중심으로」(「서양사연구」 제37집, 2007),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적용 사례: 13세기 전반기의 교황들을 중심으로“(「호서사학」 제49집, 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