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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푸른숲 2009.06.25.
베스트
예술 에세이 top100 3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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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지구 위의 작업실, 줄라이홀
'THE'와 '나'의 작업실 이야기
작업실이 지하로 피신해 들어가야 할 이유, 마흔아홉 가지
'줄리아홀'을 짓다
3만 장, 늙어도 늙지 않는 징글징글한 질병
유령과 키치, 작업실의 동거인들

작업실의 커피, 일상의 '리추얼'
커피, 자신에 대한 예의
작업실에서의 일과가 곧 리추얼이다
C8H1ON402 중독증, 우아하게 자기를 파괴하는 권리
쓸쓸한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에도 나는 커피를 볶는다
낭만아, 우리 절대 눈도 마주치지 말자
내부가 곁에 있어도 나는 내부가 그립다

작업실에 가득한 소리, 아날로그의 공감
호모 히스테리쿠스들은 모두 외롭다
차이코프스키, 나를 스치는 몽상
아날로그로 가는 길
소소하고, 사사롭고, 비본질적인

오디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오디오, 거기에 생의 '저쪽' 이 있다
음악이 다가오지 않을 때 오디오 놀음에 빠져보라
내 이름은 '톤팔이' 실은 나 불안한다
스피커, 오래된 것들의 오래된 이야기들

에필로그 -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저자 소개1

시인·문화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행적이 어떤 이에게는 ‘백수’로, 또 다른 이에게는 ‘전방위’로 비친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중학교 때 AFKN 라디오 팝송에, 고등학교 때 음악 감상실 ‘르네쌍스’의 클래식 선율에 붙들린 이래 일평생을 중고딩처럼 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수료하고 웅진출판 창립기에 편집부에 입사하여 편집부장을 끝으로 정규직 생활을 떠났다. 이후 라디오 진행자로 전업하여 거의 모든 방송사를 한 바퀴 돌았다. 이른바 ‘교양 프로그램
시인·문화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있는 김갑수는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행적이 어떤 이에게는 ‘백수’로, 또 다른 이에게는 ‘전방위’로 비친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중학교 때 AFKN 라디오 팝송에, 고등학교 때 음악 감상실 ‘르네쌍스’의 클래식 선율에 붙들린 이래 일평생을 중고딩처럼 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수료하고 웅진출판 창립기에 편집부에 입사하여 편집부장을 끝으로 정규직 생활을 떠났다.

이후 라디오 진행자로 전업하여 거의 모든 방송사를 한 바퀴 돌았다. 이른바 ‘교양 프로그램’이 멸종해 가는 환경 탓에 근년에는 종편방송 예능프로그램에 진출해 시사, 연예, 건강, 역사 등속을 버무려 말꾼으로 살아간다. 그 말들의 대가는 모조리 음반과 오디오로 바뀐다. 그 덕분에 약 3만여 장의 LP와 CD, 20여 조의 진공관 오디오 기기가 작업실 ‘줄라이홀’에 쌓이게 됐다.

《실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하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 《세월의 거지》를 출간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예술에세이 《지구 위의 작업실》, 시사칼럼집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서평집 《나의 레종 데트르》, 대담집 《인문학 콘서트 1-4》, 음악에세이집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김갑수의 다른 상품

사진 : 김선규
1987년 한겨레신문사에서 언론사 생활을 시작했다. ‘탈영병의 최후’, ‘가평 UFO 포착’, ‘목마른 참새’ 등의 수많은 특종으로 보도사진전 금상, 삼성언론인상, 언론인 홈페이지 대상 등을 수상했고, 2005년 12월에는 환경재단이 주관한 ‘세상을 밝게 하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 현재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김선규의 우리고향산책』『까만 산의 꿈』『살아 있음이 행복해지는 희망 편지』 등이 있다. ufokim.com
일러스트 : 김상민
홍익대학교에서 광고디자인을 공부했다. 2002년 한국 편집 기자 협회에서 한국편집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경향 신문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yellowbag.pe.kr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79쪽 | 477g | 153*204*20mm
ISBN13
9788971848166

출판사 리뷰

21세기 도시인은 숨어 있을 공간을 꿈꾼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만을 위한 지구 위 단 하나의 공간, 작업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한다!


도대체 왜 사는지,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런 사춘기적 질문들과 마주하느라 작업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동은 커피 볶아 마시고, 오디오 건사하고, LP 닦아 트는 일인데 그걸로도 한 생애가 흘러간다. 이 책에 담긴 작업실의 일과는 일테면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에 속해 있으나 현실을 멀리멀리 떠나가고 싶은 사람의 생활 보고서’라고나 할까. _프롤로그에서

한평생 작업실을 유일한 ‘생의 목적’으로 추구해온 한 남자가 고한다
_실용의 왕국에서 비실용적인 기쁨에 몰두해 불안했지만,
그래도 삶은 멀쩡하게 흘러가더라

의무와 책임만이 있고, 처세?경영?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실용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끊임없이 사회에서, 가족에게서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외감과 박탈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 그들은 저마다 ‘나만의 공간’을 꿈꾼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옷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는 데에는 전력 질주하면서도 나만의 공간을 갖는 일에는 언제나 소극적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나만의 공간’은 영원히 도달하기 불가능한 로망일지도 모른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숨 가쁜 현대인의 로망을 일상으로 포섭한 한 남자의 일상, 오로지 작업실에서만 벌어지는 일상을 담고 있다(이 글은 「경향신문」과 「신동아」에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의 추구에 있다는 ‘행복 담론’에 휩쓸려 ‘공인된’ 재미와 의미와 가치에 매진하지만, 결국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순간도, 뭔가 보람을 느끼는 일에 참여해도 집요하게 남는 부분”에 공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저자는 “땀구멍 하나하나까지 명명백백한” 이 세상에서 너무나 ‘멀쩡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다른 가능성을 꿈꾸라고, 조금씩은 미쳐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작업실이다.

작업실이 어디에 있든 간에, 그곳에서 무슨 작업을 벌이든 간에 중요하지 않다. 결재서류나 상사의 질책, 잔소리하는 아내, 소파에 벌렁 누워 있는 남편 등등 나를 둘러싼 외부가 모두 배제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단 하나의 공간에서, 사사롭고 비본질적인 행위에 몰두하며 되찾게 되는 어린 시절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과 ‘나’라는 존재와의 맞대면은 현대인들에게 마지막이자 유일한 해방구일 것이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조금씩 미쳤지만 멀쩡했고, 멀쩡하지만 멀쩡함의 생채기로 약간씩은 미쳤다. 차라리 유쾌하지 않은가. 이렇게 꼬물꼬물 살아서 중학생 시절의 두려움을 다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결국 아무것도 파멸하지 않았으면서 파멸의 예감으로 진저리치던 시간들이. 어디선가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그렇다. 여기 이 지하실에서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하루키는 남들에게 굳이 마라톤을 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마라톤은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귀속되는 행위다. 그렇지만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_p.279

지구 위의 작업실, 줄라이홀을 짓다

“빈대떡스럽고 돼지껍질스러운” 마포, 그것도 1층이 정육점인 건물 지하에 ‘줄라이홀’이라는 작업실을 갖고 있는 저자. 이 장에서는 한평생 작업실을 추구해온 저자가 난생처음 작업실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작업실 ‘줄라이홀’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아침에는 회사로, 저녁에는 작업실로 출근했던 회사원 시절의 이야기, 그 공간에서 시를 쓰고 음반과 오디오를 섭렵하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지상의 햇살과 소리와 날씨와 결별하고 지하에 동굴을 파고 들어앉게 된 이야기.
저자는 고군분투해서 작업실을 마련한 뒤 이렇게 일갈한다. “열다섯 살을 잃어버린 나이의 현명함, 당연히 매력 없다. 매력 없고 상스러워라, 서른 몇 살, 마흔 몇 살 심지어 오십, 육십들의 현명함이여. 죽어라고 건강을 챙기고 미친 듯이 레저를 즐기고 그 밖의 모든 시간에 일만 하는 상스러움이여. 현명함은 저축을 하고 재테크를 하고 노후 대비를 하면서 상스러워진다. 다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슬픈데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느냐고.”

세상의 회사원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나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쪼글쪼글하고 누글누글하고 나른한 게 회사원 생활이었다. 일과는 꽤나 바빴는데떵 존재는 나른했다. 익명인 탓이기도 했다. 조그만 회사라 김갑수 씨는 금방 지나가고 과장이어서 김 과장으로 불렸고 차장이어서 김 차장으로 불렸다. 부장쯤이 되고 나니까 이름은 완전히 실종됐다. 이제는 꽤나 거대 회사가 돼버린 웅진출판주식회사. 지금 그곳의 현역들은 학생 운동권 출신만으로 구성되었다던 80년대 편집부를 무슨 출판운동팀쯤으로 환상의 나래를 편다고 들었는데 아서라 회사는 회사, 업무는 업무였다. 그래서 나른했고 존재는 막막 절벽이었다.
몇 가지 홀로 고집은 있었다. 한 번도 저축을 하지 않았다. 돈 모을 여유도 없었지만 어쨌든 매달 완전히 다 썼다. 회사 생활 초창기, 의무적으로 재형저축을 들어야 했던 날 길을 걸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 당시 혐오의 의미로 자주 쓰던 표현인 ‘`이스태블리시먼트(기성인)`’가 결국 되나 보다 하고(그러고 보니 나름 순수의 시대였다). 중도에 깰 수 있다는 걸 알고 그 적금을 곧장 깨서 턴테이블을 바꿨다. 또 하나 중요한 홀로 고집이 있었다. 몇몇 친한 동료가 있기는 했지만 퇴근 후 회사 근처 호프집이나 대폿집에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 술 마시고 떠드는 자리를 극력 피했다. 나중에 사진작가 윤광준이 입사하여 둘이 단짝으로 세운대학(세운상가 오디오숍들을 이렇게 불렀다)깨나 어울려 다녔지만 어쨌든 저녁이면 종로통 회사 근처에서 멀리멀리 달아나고 봤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아침에 회사로 한 번 출근하고 저녁에 또 한 번 출근하는 이중생활이었다. _pp.19-20

중요한 건 혼자 숨 쉴 공간이었다. 멍하게 면벽하고 시간 죽이는 것도 작업이다. 나만의 비밀 공간에 틀어박히는 것. 누군가는 그것을 현대인의 로망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로망의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방문객들의 경탄을 위해 얼마나 닦고 조이고 기름 쳐야 하는지, 그 일상을 말해야 한다. 실은 나 자신이 언제나 내 작업실의 방문객이다. 문을 열고 발을 디디는 순간 탄성과 탄식, 감동과 회한, 그런 감흥이 일지 않으면 그것은 작업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작업실은 추억의 공간이다. 당장의 한순간 한순간이 추억의 시간이다. 작업실에서 살아간다는 건 추억을 생산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_p.28

작업실의 커피, 일상의 ‘리추얼’

저자에게 작업실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팔도비빔면, 뚜레주르의 버터 식빵, 햇반, 그리고 가끔씩 인근의 풍년 기사식당 김치찌개 따위”를 주식으로 하지만 “라면 먹고 이 쑤시고 그다음 차례로 차만은 제대로” 마신다. 여기서 ‘제대로’는 원두를 사고, 고르고, 볶고, 가는 복잡한 전 과정을 포괄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 리추얼(ritual). 결과만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정은 끝없이 단축해야 할 요소다. 하지만 저자는 절차와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례적 행위가 다름 아닌 문화 행위라고 말한다. “허기를 채우려고 음식을 먹고 입가심하느라고 차를 마신다면 마치 죽기 위해 산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배고픈 시절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살아왔다. 지하 작업실 안에서는 일과가 곧 리추얼이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이 재배치되는 리추얼이 벌어진다. 커피 따위를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비웃는 친구야. 그럼 네게 중요한 일은 뭐니? 재테크니? 민족 통일과 세계 평화니?”

줄라이홀의 비법 1: 저자는 글에서 원두를 고르고 로스팅하는 법을 비롯해서 에스프레소, 핸드 드립, 더치커피, 터키커피 내리는 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커피 입문자에게는 유용한 팁이 될 것이다.

콩을 고르거나 커피를 볶거나 드리핑해 내리거나, LP를 닦거나 말리거나 라벨링을 하거나 직접 틀거나 모든 것이 혼자서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정신의 허기로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이십대 시절 백양사 청류암의 상좌승 청호가 도량 뒤켠 하지감자밭의 김을 매면서 내게 가르쳐줬던 비의다. 혼자서 하염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일. 사람 없이,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사람처럼 사는 일.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정성스레 만들어놓은 원두를 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한다. 좀 웃기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웃기지 않는다.
지금 줄라이홀은 혼자를 견디는 작업을 하는 작업실이다. 아, 집에 들른 지 너무 오래됐다. _p.98

작업실에 가득한 소리, 아날로그의 공감

3만여 장에 이르는 LP와 4천여 장에 이르는 CD.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량의 음반량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콜렉터가 아니다. ‘줄라이홀’에서 끊임없이 듣고, 듣고, 또 듣는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상식과 일상의 공간, 누구나 똑같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예술 체험, 그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상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시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래식 음악은 “내가 오랜 동안 동일시하고 싶어 했던 페르소나, 그것이 나라고 확신하고 싶었던 어떤 면모, 그것 자체의 음악적 본령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의 다면 다층성을 하나의 단일한 층위로 정립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울러, 고달픈 탐구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디지털적 재구성을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더 이상 탐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턴테이블을 통해 흘러나오는 LP의 아날로그적인 감동에 대해 속삭인다.

줄라이홀의 비법 2: 저자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음악사와 현대 거장들의 음반에 관한 이야기는 클래식 입문자에게 더없이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것에 내 윗세대들은 두려움과 생존의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최신 유행가를 배우고 최첨단 개그를 안쓰럽게 구사했다. 과거에 존중받던 가치를 얼른 내다버렸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제 다들 너무 오래 살게 됐다는 사실이다. 오십대 육십대가 더 이상 인생 말년이 아니다. 노장의 무게를 잡으려니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젊은 세대를 따라잡으려니 볼썽사나운 데다 언제나 뒤처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세대 간에 딴살림을 차리고 각자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딴살림이어도 생산과 소비 인구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오래들 산다. 지구상에 아날로그의 기억이 영영 사라지는 때가 오기 전까지 재미의 신문명 이전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무치게 진지하고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추구하고 탈속한 품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재미 여부와는 장르가 다른 항목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다 같이 각자의 지하실을 파고 들어가 끝없이 출시되는 신규 버전에 눈 돌리지 말고 무시간적으로 몇십 년 살다 가자는 것이다. 아울러 이 같은 무시간의 영역을 관통하는 공통 체험이자 공감대가 있다. 아날로그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공통항. 그것은 바로 인생이란 고통이며 존재는 무겁다는 인식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자아를 무거워하면서 살았다. 마치 클래식 음악의 구조와 선율처럼. _p.165-166

오디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여섯 조의 스피커, 넉 대의 턴테이블, 넉 대의 프리앰프, 여덟 조의 모노 모노 파워앰프, CD 돌리는 트랜스포트, D/A 컨버터, 승압트랜스, 다양한 차폐 전원 장치 따위, 그리고 1913년산 빅트롤라 축음기……. 오디오 가게를 방불케 하는 기기들을 가리키며 저자는 “오디오, 거기에 생의 ‘저쪽’이 있다”고 단언하며 죽기 전에 오디오는 꼭 한번 해봐야 한다고 강권한다. 이쪽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진행되는 세계의 기쁨에 빠져보라고. 하지만 저자는 그 기쁨이 단순히 소리를 탐닉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한 가지를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 도달하게 되는,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가는 체험. 결국 작업실이라는 공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상의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의도된 행위를 오래 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명상 상태의 추구라고 말한다.

줄라이홀의 비법 3: 저자가 고수와 일합을 겨룬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하이엔드’ 오디오 세계의 일면을 엿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언가가 될 수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떤 위치로 올라가거나 무엇을 획득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음악에 포개어진 삶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획득하거나 무엇에 올라서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팔자려니 해야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루하루 음악을 듣는 일이 삶이 되면 되는 거잖아! 먹고사는 일이며 모든 관계를 도구나 방편으로 삼으면 되잖아! 그 무엇의 잣대를 ‘이쪽’이 아니라 ‘저쪽’ 세계의 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못 된 것이 아니었다. 못 획득한 것도 아니었고 못 올라선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조건들을 많이 가졌다. 뒤늦은 깨달음이다. _p.196

그리움조차도 나와 있는 시간이 바로 오래된 시간이다. 다른 시간이고 비현실의 시간이고 불변의 시간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들. 참으로 오래된 것들. 어떤 우연의 개입으로 나에게 닿아 오랜 시간을 함께 흘러온 오래된 것들. 오래된 것들은 스스로 추억을 재구성하여 현실의 나를 새롭게 조립한다. 간혹 나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게도 만들고, 낡아버린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느끼게도 만든다. 줄라이홀을 보고 이십 년 전의 작업실과 똑같은 모습이라며 이토는 “You changed nothing!”을 외쳤다. 그러니까 줄라이홀은 오래된 작업실이다. 오래된 공간이란 얼마나 다정한가! _p.254

이렇게 대책 없이 오디오를 하지 않았다면 불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닌가 싶다. 불안하기 때문에 미친 듯이 오디오를 한다고 말이다. 그럼 오디오가 먼저인가 불안이 먼저인가. 그게 그러니까 글쎄, 닭과 달걀 같은 관계더라고. 요컨대 지금 올바르게 살고 있지 못해서 나중에 나빠질 거라고 예견하는 것이 내 불안감의 전말인데 어쩔거나. 그냥 불안을 살다, 이렇게 살아가면 안 될까. 꼭 올바르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초등학교 시절은 이미 지났는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훈화 말씀을 거역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죽도록 오디오 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오디오 하다가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래, 불안을 살아가자! 번역하자면 뻔뻔스럽게 오디오를 하자! _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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