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그 유생님이 그랬잖아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소근개가 항변했다.
“바뀌어도 백정은 백정이야! 백정으로 태어난 놈은 백정의 업을 이어야 한다고!”
“…….”
소근개는 이번만은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백정의 업을 이어야 한다는 말에 이의가 없었다. 그 역시 숙명처럼 백정의 업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것은 세상이 바뀌더라도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은 도살장에 가서 소를 잡는 일보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 것이다. --- p.29
와타나베는 눈동자가 반응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사내의 눈 주위로 성냥불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청진기를 꺼내서 사내의 가슴 곳곳을 대 보았다. 사람들이 와타나베 주위로 몰려들자 소근개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래서 무릎걸음으로 기어 사람들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와타나베는 정신을 잃은 사내의 팔뚝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소근개는 주사기의 액체가 사내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정신을 잃었던 사내가 신음을 내뱉더니 깨어났다.
“여기가 어딥니까?”
사내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자 사람들은 안도하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근개는 와타나베가 환자의 입에 체온계를 물리고 사랑채로 옮기는 것까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 pp.36~37
“네가 서학에 홀려도 보통 홀린 것이 아니구나. 어디서 스승의 가르침을 능멸하려 드느냐? 서학에 그렇게 쓰여 있더냐? 오호라, 진사 시험에 수석한 녀석이 5년이 지나도록 대과에 승부를 못 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한심한 놈 같으니! 너, 수업 끝나고, 나 좀 따라오너라.”
박사는 《전체신론》을 들고 명륜당을 나가 버렸다.
도양은 직감적으로 퇴교당할 것임을 알았다. 도양은 박사를 찾아가서 사정하거나, 형조 판서인 아버지를 통해 구명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도양은 유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성균관을 나왔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답답한 학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 p.57
목 잘린 시체.
“어제 참수를 당한 죄수의 시신이다.”
도양은 대나무 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그 틈으로 시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그 시신을 해체할 것이다.”
“해…… 해체라 했습니까요?”
“그렇다.”
“시, 싫습니다요. 아, 안 됩니다요. 사람은 안 됩니다요.”
소근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 죽이는 일 빼곤 다 하겠다 하지 않았느냐? 이미 죽은 놈의 몸이다.”
“쇤네가 비록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천것이긴 하오나…… 어떻게 사람을 해체하겠습니까요. 죽은 자에 대한 도리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요?”
“저자는 죄수라 하지 않았느냐? 대역 죄인을 부관참시도 하는 마당에 이까짓 해체가 무슨 대수라고. 어서 배를 갈라라!”
“그래도…… 쇤네, 이 일만은 못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너를 당장 포도청에 넘겨도 좋단 말이냐?” --- pp.67~68
알렌은 몸에 박힌 탄환을 빼내기 위해 메스를 들었다.
문창호지에 손가락 구멍이 하나둘씩 뚫리기 시작했다. 꼬마신랑의 초야를 훔쳐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구멍에 사람들의 눈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그 눈들 중에는 석란의 것도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스로 총상 부위를 절개하기 시작했다. 황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혼을 빼놨나 보네…….”
문밖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렌의 메스가 날카로운 금속에 닿았다. 그러자 메스를 내려놓고 핀셋을 들었다. 이어 한 손으로 등의 상처를 벌리고 핀셋을 넣어 피 묻은 탄환을 꺼냈다. --- pp.103~104
“그래서…… 우리 대일본 제국의 천황 폐하께서는 귀국에 병원과 의학당을 지어 장차 조선에서도 서양 의학에 능한 의원을 키우고, 민생을 구제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와타나베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조선이 자력으로 해야 할 일이지, 남의 손을 빌려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
민영익이 대답했다.
그도 의료 문제에 대해 고종과 생각을 같이했다. 일본이 내민 손을 섣불리 잡았다간 그들의 야욕만 채워 주는 꼴이 되기 십상일 터였다. --- p.136
김옥균이 제일 먼저 달려들어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옳거니! 민영익, 네놈이로구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내는 민영익이었다. 옷은 찢어지고 부르르 떠는 몸에서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조금 전 민영익은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창가로 뛰어가는 김옥균을 발견했다. 이어 박영효와 홍영식이 벌떡 일어나 불이 났다고 맞장구를 치자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개화파들은 마치 불이 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비쳤다.
이에 민영익은 튕기듯 일어나 연회장 문을 박차고 나갔다. 우정국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회장 밖에서는 서재필과 사관생도 서넛의 칼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pp.150~151
“후유…….”
알렌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모두 합쳐 스물일곱 군데를 꿰맸다. 황정은 알렌이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바느질은 자기가 알렌보다 더 섬세하고 꼼꼼하게 잘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임조시와 함께 소가죽으로 가죽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영익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렌이 수술 도구를 정리하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황정은 마치 자기가 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 p.158
고종은 매우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라.”
“…….”
알렌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비로소 고종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대가 우리 조선 정부에 병원 설립에 대한 제안을 해 주길 바라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알렌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듯한 감동을 맛보았다. 민영익과 유희서가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 p.195
“중전은 박시제중(博施濟衆)을 말하는 것이오?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네, 그렇사옵니다. 백성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인정이라 할 만하지만,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성정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요임금과 순임금도 제대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근심하셨던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성정을 하시지 못할까 두려워하시니, 그 이름이야말로 제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전이 명쾌하게 설명했다.
“아……, 그렇소. 바로 그거요. 중전……, 바로 그거요!”
고종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성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군주가 백성을 위해 항상 갈고닦아야 할 것이지. 당장 이름을 바꿔야겠소. 서안(書案)을 이리 가져오시오.”
중전이 서안을 가져와 고종 앞에 놓았다. 고종은 붓에 먹을 듬뿍 묻혀서 한 자 한 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만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구제할 제, 무리 중 그리고 집 원 자를 써서 제중원(濟衆院). 이것이 바로 과인의 치세에 가장 보람되고 기특한 일일지로다!”
글씨 쓰기를 마친 고종은 자신이 쓴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 pp.20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