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서 시작된 나의 가족 이야기
맥멀런 집안이 중국에 정착한 것은 1880년대이다. 각각 선교사로 파견된 아일랜드인 할아버지와 영국인 할머니가 1887년에 양저우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고, 얼마 뒤 옌타이로 거처를 옮겨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버림받은 여자아이들을 모아 자수 학원과 자수 공장을 운영해 성공한다. 맥멀런 부부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 제임스 주니어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중, 두 아이가 딸린 이혼 여성 로즈 펜윅을 만나 결혼한다.
저자 제임스 맥멀런은 1934년 중국 북부 칭다오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에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고, 인력거로 등교하고, 모터보트로 바닷가에 놀러 가는 등 특권을 누리는 삶을 당연히 여긴다. 벽안의 선교사 집안 소년과 그 가족들이 중국 땅에서 경험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책 전반부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옌타이 부두에서 우리 집 모터보트를 타고 별장이 있는 절벽 밑 해안까지 갔던 때가 기억난다. 그곳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서 해안에서 10미터쯤 떨어진 데서 닻을 내려야 했다. 그 지역에 사는 힘센 중국인 남자들을 짐꾼으로 고용했다. 그들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트에서 해안까지 데려다 주고 ‘티핀’을 만들 식재료를 옮겨 주었다. ‘티핀’은 식민지 인도의 이름으로 ‘이른 점심 식사’라는 뜻이다. 우리 집 남자들은 스스로 물살을 헤치고 걸어갔다. 별장 베란다에서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두 개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부드럽고 둥근 바위는 ‘엄마 바위’라고 이름을 지었고, 높다랗고 뾰족뾰족한 바위는 ‘아빠 바위’라고 이름을 지었다. 내가 처음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경험한 것은 절벽 위 별장에 놀러 갔을 때였다.
_30쪽(옌타이에서 누린 삶)
■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간 전쟁
아름다웠던 시절은 중일 전쟁에 이어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1937년 중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일본군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버틸 만했지만, 영국과 미국이 참전하고 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자 맥멀런 집안은 중국에서 일군 모든 것을 잃는다. 결국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중국을 탈출한다. 징병 적령기에 걸려 중국을 떠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처자식과 헤어져 영국군에 자원입대한다.
소년은 어머니와 둘이서 세상 곳곳을 하염없이 떠돈다.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발음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는가 하면, ‘남자답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 뜻에 따라 ‘권투 교습’을 마지못해 받으며 매타작을 당한다. 소년의 일상은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는 ‘뜀틀’ 같지만, 꿋꿋이 시련을 극복해 나간다. 생계를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머니는 어느 결에 지쳐서 술과 향락에 절어 산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난다. 한 달 뒤 영국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비행기 충돌 사고로 사망한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장교들과 어울리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계속한다.
전쟁이 끝난 뒤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버린다. 어느 미국 조종사는 현금을 비행기에 싣고 다니며 환율 차익을 얻으려고 열을 올리는가 하면, 전쟁 전에는 상하이에서 일류였던 나이트클럽이 홍등가처럼 바뀌어 버린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난다.
이처럼 이 책은 단란했던 한 가정이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는지 절절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의 구체적인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대신에 개인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함으로써 전쟁의 파괴력을 더욱 호소력 있게 보여 준다.
■ 부모를 넘어서 ‘나’로 거듭나는 것
마침내 세인트폴 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 왔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학교 건물에 에워싸인 네모난 교정으로 갔다. 다른 부모들도 그곳에 모여 아들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인사말을 건네고 키스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중심을 잃은 내 삶 속에 유일하게 고정되어 있던 어머니가, 나를 완전히 생소한 환경인 인도에 남겨 두고, 아버지와 함께 다른 나라로 갈 터였다. 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면서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맥멀런 중령님은 그런 내 행동에 몹시 당황하면서 말했다. “이런, 제발, 남자답게 굴어라!” 아마도 이 한마디가, 장교 아버지에게 받은 그 어떤 명령들보다 귓가에 쟁쟁하게, 몇 년 내내 울렸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힘껏 위로해 준 뒤, 부모님은 떠났다.
_94쪽(남자답게 굴어라!)
운동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소년은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아버지 앞에 서면 늘 주눅이 든다. 훗날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은 소년은 애타게 그리워하던 아버지에 대한 정을 영영 채우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 한편, “나를 보고 실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게 되었구나, 이제부터는 나 혼자 엄마를 차지하겠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곧 죄책감에 빠진다. 반면에 어머니는 우아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소년에게 때론 환상을, 때론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이 책은 소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살게 되는 성장기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나는 아침에 만나서 군대식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갑판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잠깐 쐬었다. 난간에 기대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살아온 11년 동안 어머니와 나, 우리 두 사람은 모진 시간을 함께해 온 생존자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랫동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머니라고 느껴 왔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가장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닌 경험들과 다소 오래 지속된 혼란과 생소함과 괴롭힘, 대부분 나 혼자 겪어 낸 그 모든 것이 내게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앞으로 점점 더 나 자신을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돌보는 삶이 시작되리라는 것과 나 자신의 값어치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_114쪽(미국 전함 브레켄리지호 선상에서)
소년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것은 ‘그림’이다. 일본군의 횡포 때문에 집 안에서 지내던 어느 날 소년은 벽에 걸어 둔 중국 두루마리 그림을 유심히 살핀다.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가늘고 굵은 붓의 필치, 여백의 미, 색의 농담 등을 눈여겨보면서 정중동의 묘미를 간파한다. 소년은 운동을 몹시 싫어하면서도 병풍처럼 펼쳐진 자연을 감상하는 게 좋아서 체조 시간을 기다리고, ‘팬텀’과 ‘그린 랜턴’ 같은 만화책 캐릭터를 열심히 그리면서 그림 솜씨를 갈고닦는다. 훗날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비주얼 디렉터이자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교수로 대성한 저자가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 그래픽노블 & 논픽션 시리즈 ‘만화경’ 첫 책
이 책은 “지성과 감동, 가슴 뛰는 별별 이야기의 세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그래픽노블 & 논픽션 시리즈 ‘만화경’ 첫 책이다. 공교육 부실과 교육 사유화에 저항해 청소년들이 일으킨 2006년 ‘펭귄 혁명’을 그린 칠레 그래픽노블 『알라메다의 남쪽』(가제), 1989년 통독 직전의 구동독을 배경으로 중학교 1학년 소년이 겪는 성장통을 그린 독일 그래픽노블 『아이들의 나라』(가제) 등 세상 곳곳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책들을 다채롭게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