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웨슬리 해석자에게 진정한 도전은 웨슬리의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전체”를 본다는 것은 마치 연대기 자체가 웨슬리 해석의 비결인 양 그의 생애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연대기적 관심도 중요하지만, 그 관심은 웨슬리 사상의 특징인 깊이와 정교함에 대한 세밀한 관심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웨슬리의 구원의 교리와 씨름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 중 어떤 부분을 다루든, 특히 그 시점에서의 웨슬리 사상의 미묘한 의미를 구분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웨슬리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이해는, 어떤 이유에서든 18세기의 인물을 그 자신이 한 말과 뜻에 따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나는 웨슬리를 그 자신의 용어 안에서, 그의 신학이 가진 다양한 뉘앙스 속에서, 그의 신학적 종합에 내재된 긴장을 보존하는 가운데, 그의 모든 실패와 한계까지도 숨기지 않고 밝히 드러냄으로써 웨슬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서론” 」중에서
웨슬리가 가르친 다양한 교리를 하나로 묶어줄 뿐 아니라 그 배후에서 모든 교리의 원천과 맥락을 제공해주는 웨슬리 신학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다. 인간 창조에서부터 성도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양심을 선물로 주신 데서부터 성령의 친절한 인도하심에 이르기까지, 죄를 깨닫는 데서부터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까지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웨슬리의 구원 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을 생각하든, 구원 과정의 어떤 단계를 다루든 하나님의 은혜가 핵심 주제가 되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웨슬리 신학 이해에서 이 지극히 중요한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웨슬리 신학에서 울려 퍼지는 첫 화음이자 이책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다
---「1장, “하나님의 은혜, 창조, 인간의 타락” 」중에서
이렇게 개신교와 가톨릭의 통찰을 모두 활용해 용서와 갱신이라는 양면적 강조점을 가진 것이 웨슬리의 구원론의 가장 두드러지는 신학적 지문(fingerprints)이다. 이 특징은 그의 은총 이해뿐 아니라 신앙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웨슬리가 중생이나 신생의 주제에서 은혜와 신앙을 설명하는 방식은 칭의에서 그 요소들을 설명하는 방식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의 정교한 구원 교리를 바르게 해석해내려면 이러한 차이에 주의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4장,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얻는 중생” 」중에서
중생은 비록 매우 소중한 은혜의 역사지만, 더 광범위한 성화의 과정에서는 시작에 불과하다. 중생이나 초기의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목표로서 우리가 창조 시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데 다가서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 다가섬이 결코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중생은 더 광범위한 성화의 과정의 중요한 일부분을 형성하는데, 성화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풍성하고도 힘 있게 인간의 마음에 불어넣음으로써 불신앙과 교만, 자기 고집과 세상에 대한 사랑 같은 악한 성품을 제거하고 신실함과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 같은 거룩한 성품을 함양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속에서 빛나도록 인간의 마음을 씻고 정화하는 과정은 구원의 본질 그 자체다
---「6장,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얻는 성결” 」중에서
웨슬리의 논리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중요한 주제로서, 칭의 이전에는 적절히 말해 선행이 불가능하지만, 최종적 칭의에는 선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어떤 면에서 보든 이 구분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 구분은 칭의 신앙 이전의 행위를 칭의 신앙의 열매와 구분하는데, 칭의 신앙 이전의 행위는 성화시키는 은혜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에 엄격한 의미로 말하면 선할 수가 없지만, 칭의 신앙 이후에는 성화시키는 은혜의 도움을 받기에 그 은혜의 열매는 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이 구분을 통해 웨슬리가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칭의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인간의 성취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화시키시는 은혜라는 것이다.
---「7장, “최종적 칭의” 」중에서
웨슬리가 평생 많은 수고를 통해 만들어낸 정교한 신학적 종합은, 서로 아무 모순 없이 율법과 복음, 신앙과 거룩한 삶, 은총과 행위,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 부음으로서의 은혜,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선행은총의 보편성과 구원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인간의 응답, 그리고 초기의 칭의와 최종적 칭의를 모두 함께 붙든다. 그렇다면 웨슬리 신학은 사실상 하나의 “종합적인”(conjunctive) 신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웨슬리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유혹은, 다양한 신학적 기둥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기둥을 손상시키는 태도일 것이다. 이 유혹에 넘어진 결과는, 예를 들면 웨슬리를 “개신교적” 인물이나 그렇지 않으면 “가톨릭적”인 인물 등으로 어느 한 면만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 신학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고, 웨슬리 신학의 넓이와 그가 주의 깊게 만든 신학적 세밀함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