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태어나 처음 하는 말, 누구나 살아가며 가장 많이 하는 말,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피맺혀야 하는 말, 엄마.
둘러보면 세상은 그 엄마표 아닌 것이 없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건널 때도, 사람을 만나거나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건강 조심해라, 길 조심해라, 사람한테 친절하고, 물건 아껴 쓰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조분조분 따라 다닌다.
엄마가 계시는 한 바람 부는 것도, 비 내리고 눈 오는 것도 단풍 들어 낙엽 지는 그 어느 계절도 봄 냉이 된장찌개 냄새나 호박 수제비 보글대는 푸근한 소리가 된다. --- p.8, '책을 내며' 중에서
애교쟁이 첩의 영혼이라 몸속을 파고든다는 봄바람이 차다. 블라우스 단추를 여미고,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찌르면 만져지는 작은 메모장 하나. 책은 그 메모장에서 시작됐다.
메모하는 습관이 있긴 하지만 이 메모는 나와 엄마의 전투 기록이다.
엄마는 올해 8학년 2반인 할머니다. ‘노인’과 산다는 게 때론 고집과 완고함에 가슴 답답해지고 잦은 의견 충돌로 하루걸러 싸움판이지만 그래도 정신 건강엔 약이 되니 막내딸과 토닥토닥 싸울 수 있다는 게 한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 p.9, '책을 내며' 중에서
때론 잔소리 같고, 때론 짜증나던 엄마의 말들.
하지만 ‘옛날 분’인 엄마는 엄마의 버전과 방식대로 자식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헤쳐 오셨다. 언제부턴가 그런 엄마의 말들이 버릴 것 없는 가르침이고 유산이란 생각이 들었고, 엄마 말에 딴죽을 걸던 난 조용히 엄마 말을 듣고 그 말을 조각조각 옮기기 시작했다. (책을 내며: p.9-10)
부르기만 해도 눈물 나는 말, ‘엄마.’
나의 엄마는 누구보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어머니지만 그러나 누구보다 위대한 ‘내 엄마’다. --- p.10, '책을 내며' 중에서
엄마는 서른아홉에 나를 낳았다. 그러니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엄마는 사십대 중반이었고, 중학교 때엔 오십대였다. 난 그런 할머니 같은 엄마가 친구들 보기에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순애야, 니네 엄마 온다.”
친구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점에 마주 걸어오는 엄마가 보였다.
“아니야, 우리 엄마. 너희들 먼저 가.”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그리고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친구들 속에서 나는 흰 머리 희끗하니 주름진 엄마를 피했다. 그런 날이면 꺽꺽 울음에 받쳐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깨를 들썩이며 목이 메어지는 설움은 그러나 엄마를 외면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난 주워온 아이일 거라는, 속절없이 밀물지는 외로움 때문이었고, 길러준 엄마가 하필 할머니 같은 데 대한 창피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창피함, 그것이 엄마에겐 평생 섭섭함을 긷는 우물이라는 걸 난 눈치 채지 못했다. --- pp.14-16, '1.엄마의 우물' 중에서
엄마는 내가 ‘할머니’란 호칭으로 부르면, 샐쭉하니 말문을 닫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엄마는 ‘철부지’란 호칭 속에 숨겨뒀던 비밀을 풀어 놓았던 것이다.
‘엄마가 늙어서 창피했냐’ 그 말은 엄마에 대한 내 창피함을 두레박 삼아 엄마의 가슴 속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차고, 시린 섭섭함 그것이었다.
정말 몰랐었다. 엄마를 피해 딴 길로 돌아가거나 엄마가 지나갈 때까지 골목 담벼락에 몸을 숨긴 나를, 엄마를 피하는 내 그림자조차도 엄마는 보지 못했을 거라 믿었던 나의 완전범죄들. 그러나 엄마는 버선목 뒤집듯 진즉부터 환히 들여다보며, 당신의 가슴속 우물 깊이 두레박 하나 재워두었었던 것을.
“내가 뭐, 언제?”
“다 봤어, 이것아 담벼락에 찰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힐끔대는 거. 세상천지에 엄마 보고 도망가는 자식도 있냐? 이 철없는 것아.”
나는 내 빈 밥그릇에 물을 부으며 곱게 눈을 흘기는 엄마 겨드랑이에 팔을 걸고 머리를 기댔다.
“어떻게 봤어? 봤으면 그 때 말을 하지, 아니, 막 패주지 그러셨어, 응 유 박사.”
“어떻게 본 늦둥인데, 때릴 데가 어디있었다구... 이거나 어여 마셔.”
물 부어 담은 밥그릇을 내미는 엄마 손에 꽃이 피었다. 눈시울 젖어 자꾸만 흐려지는 엄마 손등의 저승꽃.
“왜 미신 믿는 늙은 어미가 주니까 챙피해?”
“아니, 누가 그래 창피하다고, 부자 된다며? 나도 부자 될 거야. 부자 돼야지.”
엄마 가슴 속 우물 한 사발을 비우던 그 날. 엄마의 섭섭함도 내 어린 시절 철없음도 섞어 비우며 난 엄마 말대로 마음 한 사발 뜨거운 진짜 부자가 되었다. --- pp.16-19, '1.엄마의 우물' 중에서
“버렸냐니깐!”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는 ‘그 거하고 고 밑에 거’가 묻혀있는 마당을 지나 곧바로 부엌으로 행차했다. 그리곤 당신의 이뿐이 스뎅이 없어질 걸 확인하곤 나를 쥐 잡듯 몰아부쳤다.
“그냥...계속 쓰지도 않고 계속 여기 그냥 있으니까...”
“그래서?”
“엄마가 안 쓰는 줄 알고, 그냥...”
“그래서, 버렸냐니깐!”
엄마는 인중에 땀까지 맺혀가며 눈을 부라렸다. 누가 스뎅하고 나를 바꾸자고 하면 얼씨구나 당장에라도 바꿔버릴 기세다. 잔뜩 화가 난 엄마를 보며 난 그깟 낡아빠진 스뎅이 뭐라고 이토록 쥐잡듯 하나 싶어 욱하는 심정으로 홱!하니 엄마를 등졌다.
“버리기만 해? 구질구질한 거 꼴봬기 싫어 확! 마당에다 묻어버렸어.”
난 제풀에 억울해져 마루짱을 쿵광대며 마당으로 나왔다. 엄마는 그런 내 뒤를 따라오며 뒤통수에다 연신 콩을 볶아댔다.
“여자가 말야 알뜰해야지, 막 갖다 버려? 니 살림이면 그래? 왜 엄마 물건 건드려?”
늘 헌 게 있어야 새 게 있지, 버리는 거 너무 좋아하면 못 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였다. 노발대발 쏟아지는 엄마의 잔소리가 홍수 지도록 난 ‘그 거하고 고 밑에 거’가 묻혀 있는 마당 자리를 꺾어 신은 운동화발로 북북 문지르며 억울한 심사를 눌러 삼켰다.
고혈압과 고지혈증 때문에 매일처럼 약을 달고 사는 엄마였다. 더 이상 그런 엄마의 화를 돋아대며 부채질을 할 순 없었다.
“여기.”
나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운동화발로 스뎅 묻은 자리를 까닥까닥 두드려 보였다.
“파!” --- pp.32-34, '3. 난 엄마 집에서 산다' 중에서
그 거하고 고 밑에 거 스뎅은 여전히 엄마의 애정전선 속에 붉고, 샛노란 채송화와 베고니아 꽃을 받들어 엄마를 미소 짓게 하고, 버리기 좋아하는 죄 많은 나는 꽃향기를 호흡하는 엄마 뒤에서 허리를 안고 등에 얼굴을 기댄다.
“유 박사.”
“왜 또?”
“있잖아 나 말야, 유 박사가 스뎅이었음 좋겠어.”
“구질구질 하데며, 왜 내다 버릴려고?”
“깨지지도 않고, 닳지도 않고, 가꾸면 다시 반짝반짝 예뻐지고...엄마, 늙지 않는 스뎅 해라.”
봄 날 마당 지피는 치자꽃 향기, 그 달달한 향기도 엄마 거인, 난 엄마 집에서 산다. --- pp.34-35, '3. 난 엄마 집에서 산다' 중에서
엄마는 리모컨을 집어, 여전히 벗어부친 채 배배 몸을 비틀어대는 애 안 서게 생긴 기지배들을 얼굴 손 빼고는 온 몸을 둘둘 감아 감춘 한복차림의 아줌마로 바꿔놓았다. 핫도그 같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모아 쥔 한복 아줌마가 무대 사회자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엄마는 계속 혀를 찼다.
“왜, 얼굴 빼곤 다 가렸구만. 이제 이 거 빻으면 돼지?”
나는 몽당 절구 공이를 집어 들고 플라스틱 절구에 마늘쪽들을 우르르 쏟아 부었다.
“저 봐라, 틀렸잖냐, 저렇게 오른치마로 입는 게 아닌데, 왼치마로 입어야지. 저 봐라, 저 봐.”
엄마는 절구 공이를 움켜 쥔 내 손등을 토닥이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어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라고 재촉이다. --- pp.55-56, '6. 만물박사 유박사' 중에서
난 절구 공이로 조근조근 마늘쪽들을 눌러 으깨며 마저 남은 깐 마늘을 한 움쿰 집어 들었다. 엄마는 그런 내 손목을 낚아 쥐고는 나를 버쩍 일으켜 세웠다.
“봐, 따라해 이렇게 왼쪽으로 치마를 쥐고 돌려, 저 애 엄마처럼 이렇게 오른쪽으로 입는 건 기생이나, 하녀들이나 그렇게 입는 거야.”
엄마는 있지도 않은, 내가 쥐고 있는 치맛자락을 확인하고는 당신한테도 없는 치맛자락을 보란 듯이 왼쪽으로 획 감아말고는 껌뻑껌뻑 눈짓으로 따라해 보란다. 마늘 한 줌 움켜쥔 손으로 공갈 치맛자락을 왼쪽으로 휙 감아마는 동안 기생도 아니고 하녀도 아닌 조신한 아줌마가 핫도그 같은 마이크를 뜯어먹을 듯이 늴리리 맘보를 부르고 있다. --- pp.58-59, 6.만물박사 유박사' 중에서
엄마표 지식은 '딸들은 들들볶으며 키우랬다, 문지방 밟지 마라, 해 진 다음엔 손발톱 깎지 마라, 깎은 손발톱 휴지통에 버리지 마라, 봄바람은 품 안으로 들어가니 멋부리지 말고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이것도 말고 저것도 말고 하지 말고, 또 하지 말라던 시어머니의 잔소리. 그 립싱크일지도 모른다. 마늘처럼, 생강처럼 맵고 아린 것들이 어울려 제 맛 드는 김치속처럼 누구의 며느리였던 엄마는 그렇게 고된 시집살이를 버무려 우리 6남매의 참 맛 든 엄마로 살아왔다.
“네네, 만물박사, 유 박사님.”
저린 배추 레이스 치맛단을 훌러덩훌러덩 젖혀 처벅처벅 속을 넣는 엄마 앞에 얼굴을 내밀고 새끼 새 마냥 입을 벌린다. 길게 찢은 배추를 속쌈 둘러 돌돌 말아 입에 넣어주는 엄마 눈앞에 난 힘차게 팔을 뻗어 엄지손가락 하나 세차게 치켜 올린다. --- p.60, '6.만물박사 유박사' 중에서
억새들이 하얗게 꽃씨를 물고 바람에 굽어 있다. 그렇게 엄마도 백발을 피워 올리며 굽은 허리로 산을 오른다. 나서 살다 돌아가는 인생살이 세 고개는 웬 고개냐며 고개고개마다 눈물이 난다는 진도아리랑이라도 따라 부르는 걸까. 엄마는 산길을 오르며 연신 입 안에 흐느낌을 물고 있다.
마중 나온 이모와 내가 곁에서 부축하고 산을 오르는 내내 입 속 울음가락을 물고 있던 엄마가 외할머니 산소 앞에서 기어이 그 울음을 토해낸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젖무덤 같은 묏등에 안겨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다.
“언니, 그만 해, 기운 빠져요.”
벗겨진 엄마 신을 주워 신기며 이모는 엄마 어깨를 흔들었다.
“혓바닥으로 신발창을 대도오오 그 은공 다 못 갚는 댔는데에, 미안해요 엄니이, 정말 미안해요, 엄니이이.”
엄마는 이모가 그만 하라고 흔들어도 울고, 이모는 그만하라며 엄마를 흔들며 운다.
접동새 울 때마다 피던 진달래꽃들은 져서 그 꽃자리, 엄마가 “엄니, 엄니” 대신 울음 우는 눈시울 붉은 산자락을 넘지 못하고 저녁 해가 목이 메여 한참을 걸리어 있다. --- p.93, '11. 엄마의 엄마' 중에서
“엄마 내 혓바닥으로 엄마 신발창 삼아줄까? 그러면 한 천년 쯤 사시나?”
난 된장찌개도 뜨거 홀홀 혀를 굴리며 엄마한테 샐샐 댄다.
“엄마 놀리면 지옥 간다.”
“설마 엄마가 날 지옥 보내겠어?”
“내가 보내나, 염라대왕이 보내지.”
“그럼, 염라대왕 엄마가 염라대왕한테 이럴 걸?”
“뭐라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아.”
된장찌개 나누는 구수한 저녁답, 보글보글 엄마가 웃고 있다.
--- p.94, '11.엄마의 엄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