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링 여자들은 뒤엉킨 기대 속에서 살고 있었고, 개혁과 개방에 따른 경제적인 압력은 특히 여자들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중국 농업 인구의 66퍼센트는 여자다. 여성 자살율이 높은 데에는 이런 불균형도 일조한다고 믿는 사회과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여성의 자살은 시골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시골에서의 죽음이 가난 때문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소작농 중에서도 비교적 풍족하거나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들이 목숨을 끊는다. 아담이 가르쳤던 자넬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넬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소작농 집 딸로서는 흔치 않은 교육의 기회도 누렸다. 하지만 자넬이 사회에 나가면 십중팔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을 텐데, 그렇게 총명한 사람에게는 우울한 전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과 함께 암울한 미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골의 교사가 되어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미래. 그것은 자넬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또는 이하―이었다.
--- pp 349
둘째 아이를 낳기 위한 요금은 통상 1만 위안이 넘었다. 적어도 대학 주변 시골의 상황은 그랬다. 도시에서 이 정도면 누구나 기꺼이 벌금을 내려 했기 때문에 둘째 아이를 임신한 여성에게는 해고 위협이 가해지곤 했다. 국영 단웨이 소속이 아니라면 또 다른 압력이 준비되어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을 경우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계획 시책에 익숙한 듯했고, 별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푸링의 복잡한 길과 막히는 도로 위에서 매일같이 씨름을 하다 보면 인구 억제의 필요성이 몸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시골에서는 당국의 눈을 피할 수도 있고, 아예 이런 눈속임을 부르는 말까지 있었다. 찬성 유지두이産生遊擊隊, 즉 게릴라식 아이 낳기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친척집에 가서 몸을 푼 다음 집으로 돌아와서 벌금을 냈다. 도시 인근에서는 당국의 관리가 워낙 철저해서 그리 흔치 않았지만,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평균 가족 구성원의 수는 증가했다.
--- pp 325
양쯔 강엔 너무나 많은 역사가 서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모든 바위는 뭔가를 닮은 형상이고, 모든 지류에는 전설이 따라 흐르며, 모든 골짜기는 과거의 얘기들로 묵직하다. 이런 모든 역사 속에서 새로 만드는 댐이 전에 없이 새로운 종류의 파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을 그렇게 멈춰 세운다는 건, 강을 호수로 만들어버린다는 건, 왠지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기적이라서 그런지 나는 사원이 유실되거나, 주변 경관의 위용이 덜해지거나, 심지어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 마음을 가장 괴롭힌 건 꼼짝없이 고여 있어야 할 물이었다. 나는 다닝과 샹시와 양쯔 강의 물살이 느려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강들은 빠르게 흐를 운명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그건 그 강들의 본질이었다. 그곳에 서린 역동적인 힘과 생명과 충일함이 10년 후면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 pp 162~163
그리고 그들은 시의 형식을 이해했다. 시의 조각을 완성해냈듯이, 그들은 그것을 해체할 수도 있었다. 시의 운율을 맞출 줄 알았다. 그들은 각 행의 강세가 어디에 놓이는지를 알았고, 운율의 파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시를 읽을 때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그들은 소네트를 들었다. 미국 학생들 중에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그 사실에 나는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전통 문화의 모든 가치를 하나하나 찾아내서 파괴했는데, 시의 음미에 있어서는 어떻게 된 게 미국인들이 더 완전무결하게 끝장을 내버린 것만 같았다. 미국 사람들 중에서 시를 암송하거나 운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푸링에서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누구나 중국 고전시―두보杜甫, 이백李白, 또는 굴원屈原의 작품들―를 최소한 열두 편은 외워서 암송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도 촌구석이라고 할 수 있는 쓰촨의 시골 출신인 젊은이들이 말이다. 그들은 여전히 책을 읽었고, 여전히 시를 읽었다. 그게 달랐다.
--- pp 63~64
평화봉사단을 중국어로는 허핑두이和平隊라고 하는데, 이 간단한 세 글자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반미 선전이 극에 달했던 문화대혁명기에 중국 정부는 평화봉사단을 시도 때도 없이 비난했다. CIA와 한통속이라느니,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느니, 미국에서 제3세계 국가에 자본주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이런 일을 좋아라 맡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다는 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어도 이곳 사람들처럼 정치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법을 터득했는지, 평화봉사단이 1993년에 중국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또 다른 명칭이 만들어졌다. 메이중 유하오 쯔위안저美中友好自願者, 즉 미?중 우호 자원봉사단이었다. 글자는 훨씬 많고 복잡해졌지만, 거기에 함축된 의미는 훨씬 단순했다. 대학 관계자들은 우리 학생들에게 ‘평화봉사단’이라는 말을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로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대부분 그 지시에 따랐다. 그렇게 완곡해진 명칭을 달고 나는 문화대혁명의 잿더미 위에 세워진 대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러 왔다. 이곳에서 역사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어디를 봐도 정치성이 깃들여 있었다.
---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