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면 남자는 갑자기 꽃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걸 괜히 찍는다던가. --- p.33
누군가를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최근 ‘재회’에 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눈부시게 사랑했거나 눈물 나게 아꼈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상상을. 우리는 유리 틈 하나를 두고 투명한 창을 통해 처음 서로를 알아보았는데 그 쏟아지듯 반짝이던 햇살 같은 순간이 바래질까봐 다시 보는 상상마저 쉽게 엄두가 나질 않더라. 설레는 데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감정을 담아 어디 급속 냉동이라도 시킬 순 없는 걸까. --- p.54~55
그녀는 정지 화면이 되었다. 백미러로 그녀의 모습이 겨울 서리만큼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 순간은 마치-주위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김을 보지 못했다면 얼어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작은 감탄사가 겨울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 p.92
여자가 찍는 마침표엔 의미가 있다. 평소에 귀찮아서 찍지 않는 마침표에 한 점 찍는 것엔 분명한 의미가 있다. --- p.105
가끔, 이 사람을 내가 만났나 싶은 감정을 넘어 상자 속 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이 실재하는 인물인지, 지구 어딘가에 살아는 있는지, 상상 속 인물은 아닌지, 움직이긴 하는지, 말은 하는지, 목소리를 들으면 낯설지 않을지, 그냥 그림은 아닌지, 하도 사진에 익숙해져, 내가 만났다고 믿어 버리게 된 건 아닐지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 p.116~117
바람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가 들려. 유행가 한 줄에도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수천 길의 추억이 수만 마디의 하지 못한 말이 --- p.148
상상해 보았다.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서 마주쳤을 때가 가장 슬플 것 같다. 사람 북적이는 아침 버스에서 승객들로 가득 찬 상태라 힘겹게 제치고 다가가기도 뭐한 거리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떨까. 먼저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놀랐을까. 모른 척했을까. 대답은 했을까. ……무심하게 바라보는 버스 빈자리 위로 외로운 아침볕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제법 내렸다. 치익-열리는 버스 출입문 소리에 아침부터 하게 된 쓸데없는 상상을 환기시킨다. --- p.151~152
나는 이 노래를 발표하며 앨범 소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 넣었다. ‘이 음악을 듣고 눈물짓는 당신은 20대, 이 음악을 듣고 웃음 짓는 당신은 30대일 것입니다.’ 인생은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당신의 사랑이 부디 아프지 않길 바란다. --- p.172~173
뮤즈가 현재진행형에서 소멸하면, 그 뮤즈로 인해 썼던 곡들의 감정의 실체가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 분명해진다. 이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감정에 관한 집착이나 투쟁의 산물인지를 말이다. 때로는 그 사람 때문에 쓴 곡치고 너무 좋은 감정이 들어 있어서, 내 마음대로 그 시간을 왜곡하거나 곡을 지워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음악가에게는 모두 그런 뮤즈가 하나쯤은 있다. 오늘, 유효기간의 끝에서 누군가가 소멸하는 흔적을 발견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유효기간이 끝나도 버려지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라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