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무서웠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때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 p.62
그녀는 내가 애써 외면했던 인간적인 나, 수면 아래서 숨을 참고 때를 기다리던 감정들의 잔물결을 슥 건져내고는, 내 내면 깊숙한 곳까지 한걸음에 저벅저벅 걸어와 맑은 눈으로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예전처럼 자신을 꼭꼭 숨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시하려 해도 버드나무처럼 가지를 드리우고 있던 외로움은 어디서건 유안의 손을 잡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p.64
지나가보면 행복이었던 순간이 참 많지만 그 당시에는 모르거든.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하면서 살아가면 결국 멀리서 보면 행복일 수도 있는 순간들을 전부 놓쳐버리고 말아. 그러니까 그냥 맘 가는대로 살아. 감정 숨기지도 말고, 모른 척하지도 말고, 눈치 보지 말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 p.224
진심은 언제나 닿는다고 했다. 어떤 길을 타고 전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길이 항상 꽃길이어야 하는 법은 없다. 가끔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가야할 때도 있다. --- p.287
샤워를 할 때마다 배수구를 막은 것은 복수심에 똘똘 뭉친 머리카락도, 내 속에서 나가떨어진 잡념도 아니었다. 그저 용서하고 싶다는, 내 속에서 차마 불 밝히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 p.306
여름밤의 나른한 미풍이 집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비록 미풍이지만 그 미풍에는 지난날의 괴로운 기억과 쌓여온 원한을 모두 몰고 나갈 힘이 있었다. 바람에 유안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 p.311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몰랐어요.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어요. 용서 자체가 사랑에 기반 해서 생기는 거니까.
이 소녀를 보라. 안현서라는, 이 날카로운 소녀 작가는 제주도 바다 물빛 강렬한 원색적 세계 같은 소설 문장 속에 사람의 삶의 인연과 운명과 새로운 삶을 향한 희구를 수놓는다.
"저 그림 속 남자는 울고 있지만 울고 있지 않아요. 그냥 우는 척을 할 뿐, 사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요.“
이 소설이 말하는 민모션증후군이란 울고 싶어도 소리 내지 못하는 병, 슬픔을 슬픔으로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모든 일에 확신을 잃어버린 이 시대 사람들의 정신적 병리를 엿볼 수 있다. 안현서는 소설의 표면에 사회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이 시대 사람들의 유행병을 날카롭게 포착해 보인다. 순수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것, 완전한 것에 가까움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린 것, 미숙한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순수하기에 근원에 가닿는 시선을 여기서 발견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