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sum에 집중함으로써, 에고를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고 그 존재로부터 생각하고자 함으로써 에고의 의미를 전적으로 오해했다. 그는 자아의 내재적 핵심이 존재(Etre)의 영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자아는 어떤 방식에서도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무차별을 이유로, 존재 물음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데카르트를 비난했지만, 그러한 무차별, 무관심은 결함이 아니라 전례 없는 대범함, 존재에 낯선 에고의 수수께끼를 돌파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후설은 내재적 자아가 세계‘와 존재’를 벗어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것을 작용 밖에 둠으로써 데카르트에 다가갔다. 그는 자아가 존재를 “앞서며”, “근원적인 선-존재[Vorsein]”, “근원적인 삶”, 그렇지만 “매우 구체적인 자아”가 문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너무도 새로운 생각이어서 이해받지 못했다. 후설의 후계자는 대부분 반대로 하이데거의 길을 좇고 존재의 지평에서 자아나 주체를 붙잡으려 했다. --- p.82~83
죽기 몇 주 전에 메를로 퐁티는 알쏭달쏭한 필기를 남겼다. “프로이트 철학은 신체 철학이 아닌 살―그것(Es), 무의식―의 철학이다. 그리고 [상관적] 자아는 살이라는 존재(Etre)에 하나로 ‘대거’ 들러붙은 데서 ‘분화하는 것’으로 […] 살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메를로 퐁티의 지적을 따라 프로이트 이론을 “살로부터” 이해하되 “존재의 보편적 요소”로 더는 규정되지 않는 살, ‘언제나 내 것’인 살로부터 이해하며 프로이트 이론을 재정초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관점에, 곧 자아와 살의 근원적 결합이라는 관점에 자리 잡을 때, 프로이트 저서를 수놓는 천재적 직관은 새로 빛을 발한다. 꿈이나 환상이나 욕망의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성격, 리비도의 “근원적 나르시시즘”, 신체운동과 “운동 방출”의 리듬이 갖는 중요성, 신체 표면의 촉각 지각에서 나온 “자아-신체”, 초자아를 이루고자 자아 표면에 새겨지는 청각 흔적이나 목소리의 파편, 이 모든 것이 에고-분석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 p.129~130
사유의 차원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에게 모든 걸 빚진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자아를 격하하거나 지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가 오늘날 힘의 의지, 언어, 무의식, 존재라고 명명하는 위대한 기만자, 나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나”는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위대한 기만자의 셀 수 없는 속임수를 경계하도록 한다. 우리의 프랑스 기병은 위대한 기만자의 술책에 굴복하기 전에 그 술책을 좌절시켰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데카르트 그 자신에 맞서서, 그가 “ego sum”의 특권을 부인하기에 이르도록 한 것에 맞서서,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에고살해에 맞서 자아를 옹호하고자, 에고를 다루는 근본적인 생각을 재구성하고자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인 이 자아가 누구인지를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p.202
레스탕이 ‘참으로’ 낯선 것이 아니라는 데 적어도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레스탕이 내 삶에 불법으로 침입할 때, 여전히 내 살이 내게 주어지고, 나는 나 자신을 대상으로, 내 에고의 알려지지 않은 한 부분을 대상으로 불안해한다. 이 유령한테 쉼 없이 쫓기고, 이 유령을 대상으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기로부터 자기를 촉발할 뿐이다. 살의 종합이 행해지기에 앞서, 내 살은 먼저 촉각 속에서 세계의 다른 사물과 비슷한 외재적 사물처럼 그 자체에 주어진다. 그러한 극은 같은 살의 부분처럼 알려지지 않았다. 키아슴은 자아-살의 모든 극 안에서 자아-살을 자체에 드러냄으로써 이 근원적 은폐를 없애기에 이른다. 키아슴은 진리를 만든다. 키아슴은 알레테이아의 주요한 한 양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드러남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며 살은 전적으로 노출되기를 거부한다. 모든 극에서 비-살의 일부처럼 다른 극에 고집스럽게 주어지는 내 살의 일부가 레스탕이다. 이는 레스탕이 어떤 고유한 확고함도 지니지 않는다고, 가상이나 불가피한 착각, 자아-살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반-진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전적으로 외재적인 요소, “불청객”, 인위적으로 옮겨 심은 “보철”처럼 그 현상을 헤아림으로써 그것을 잘못 생각한다. 물론, 레스탕은 그처럼 제시된다. 그것은 바깥으로부터 나를 괴롭히는 타자의 특징을 띤다. 하지만 이는 레스탕이 그 본래적인 정체성을 숨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내 살의 살이다.
--- p.294~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