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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수

우애수

[ 애장판 ]
심윤서 | 가하 | 2017년 09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88건 | 판매지수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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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500쪽 | 592g | 128*188*30mm
ISBN13 9791130023038
ISBN10 113002303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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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우애수!”
“……?”

주홍색 자몽주스를 달그랑달그랑 저어대던 여자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도회적이고 약간 건조하다 싶은 여자의 목소리 끝에 아이 같은 즐거움이 대롱거렸다.

“예전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었어요. 거기서 우애수가 나오거든요. 우애수가 맞죠? 신의 손길로 맺어진 아름다운 한 쌍의 숫자요. 뭐더라…… 무슨 약수를 더한 값이 일치하는 숫자라고 했는데…….”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지 여자는 조금 넓은 듯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진약수죠. 자신을 제외한 약수.”

여자의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고 진교는 여자의 얼굴을 새삼 다시 바라보았다. 여자가 우애수를 알고 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맞아요. 진약수요.”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진교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돌멩이를 던진 연못처럼 알 수 없는 동심원이 가슴속에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제 생일이 2월 20일이거든요. 220의 우애수가 284잖아요. 그래서 저는 284와 연결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걸 좋아해요.”
“수학을 좋아하시나 보죠?”
“아니요.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이었어요. 진교…… 씨, 진교 씨라고 불러도 되죠? 진교 씨가 수학을 가르치신다기에 머리를 쥐어짜낸 거예요. 이게 제가 아는 수학의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

수학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여자는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여자의 모습에 가슴속 동심원은 점점 더 크게 퍼져나갔다.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찰랑찰랑 연못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간 동심원이 부드럽게 수초를 어루만지듯 진교의 가슴은 이제 간질거리기조차 했다.

어색한 인사가 끝나고 음료를 시키고 내내 불편한 침묵이 테이블에 내려앉는 동안 여자는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 관심거리를 찾고 있었나 보다. 여자의 배려가 진교는 불편했다.

“어머? 어디 다치셨나 봐요?”

또다시 찾아온 침묵을 어떻게든 걷어보려는 듯 여자는 진교의 옆자리에 세워놓은 알루미늄 목발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의 천진한 물음에 진교의 오른쪽 눈가에 파르르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작년 시상식 때 배용준 목발 보셨어요? 진교 씨도 블랙으로 칠하세요. 근사하던데요?”
“…….”
“많이 다치셨나 봐요. 그런 줄도 모르고…….”
“……?”

“제가 들어올 때 내내 앉아 계셔서 좀 불쾌했었거든요. 이 남자, 매너 참 없다 하구요. 아프신데 나오시게 했네요. 시간, 미뤄도 상관없었는데.”
“…….”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진교는 입술만 꾹 다물고 커피 잔만 내려다보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쥔 채 물끄러미 무표정하게.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대답 없이 뚱하게 앉아 있는 진교의 태도에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시무룩하게 물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밀어내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의 모습은 투정을 부리는 듯 조금 귀엽기조차 했다.

“그, 그건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선 자리인 줄 모르고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어머! 그랬군요.”

진교의 대답에 여자는 놀란 듯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눈썹을 휘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여자의 얼굴이 맑았다. 진교는 마주 웃어주지 못하고 커피 잔을 들어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켰다. 씁쓸한 커피를 억지로 밀어넣듯 삼킨 후 여자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억지로 만든 자리인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네에…….”

여자의 어깨와 눈썹이 동시에 살짝 아래로 처졌다. 테이블 위에 평온하게 내려앉은 4월의 햇살을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무겁게 휘저었다. 동심원이 일던 진교의 가슴도 묵직해졌다. 얼음이 녹아버려 묽어진 주스 잔을 하릴없이 저어대던 여자는 천천히 스트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날게요. 저는 진교 씨가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네요. 진교 씨가 참 좋은 사람 같아서요.”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거 같은 독특한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에서 가실하게 마른 바람의 울림을 느꼈다. 진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서운한 듯, 겸연쩍은 듯, 어설픈 미소가 여자의 얼굴에 떠돌았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어요.”

악수를 청하는 여자의 하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진교는 동글동글하게 바싹 자른 여자의 손톱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 손을 잡아주지 못하고 앉은 채 살짝 고개만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꽤 쿨한 사람인 듯, 아니면 습관인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핸드백을 들고 또박또박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레몬 빛 스커트 아래로 매끈한 종아리가 눈부셨다. 진교는 곧고 하얀 다리를 바라보다 휙 고개를 돌려 호텔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불타오르듯 만개한 핏빛 영산홍이 아프도록 망막에 박혀들었다.

“있잖아요. 오늘이 4월 28일이잖아요. 영국식 날짜 표기를 하면 28일 4월. 284가 되더라구요. 220의 우애수를 찾은 거 같아서 조금 전에 속으로 흥분했었거든요. 죄송할 거 없어요. 진교 씨도 진교 씨만의 우애수를 찾으세요.”

요란한 영산홍의 붉은색을 바라보던 진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구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맑게 웃어주는 여자는 모과꽃 같았다. 수줍게 피어나는 작은 꽃.

여자가 봄바람처럼 상큼하게 나가버리자 진교는 피식, 씁쓸하게 입매를 기울이며 알루미늄 목발을 바라보았다.

“우애수라…….”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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