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년 전 난 낙성대 쪽으로 후문이 난 대학을 다니다 군 입대를 기다리며 휴학중이었다. 지금은 고시촌으로 변한 신림9동 꼭대기의 연립주택 지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함께 자취를 하던 고등학교 동창 오철동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간다며 나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선불로 낸 방세의 기한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근처로 방을 옮길 생각이었다, 아침은 굶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사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처지여서 두 학기 연속 휴학중이었지만 학교 근처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었다.
송탄 양공주촌 옆 시장통에서 막걸리 쉰내가 풍기는 선술집을 하는 어머니와 소식을 주고받은 지도 거진 일 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하나 있던 여동생 경희가 가출을 했다는 소식 이후 끝이었다, 걔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 대충 짐작이 되었지만 나는 무덤덤했다. 더이상 고향집과 연락을 두며 살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게 다 싫었다. 학교에도 뜻이 없었고 오직 군대에 들어가 차디찬 M16 소총을 끌어안고 팔꿈치나 무릎에 피가 배도록 빡빡 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김소진은 정결한 사람이다. 그의 산문은 그의 심성처럼 정결하고 허튼 군더더기가 없으며 경기도 사투리처럼 아름답다. 짧은 소설은 허욕이 없고 속임이 없다. 환한 대낮 토방 앞에 놓여 있는 항아리처럼 무뚝뚝히 명백하다. 사람은 가고 복숭아꽃은 피었다 지고 또 글은 열매와 마른 씨앗처럼 남는다. 나도 남아 있다. 아, 슬프다. --- 성석제(소설가)
김소진 소설의 일관된 관심사는 전혀 인공낙원과 무관한 자리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문명의 주변부를 그야말로 인간적 본성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한마디로 김소진은 언제부턴가 어느 누구에게서도 호명받지 못하던 스러져가는 주변부의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충실한 서기관이자 대변인이었다. 김소진은 문명과 개념의 개입을 받고 주변부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통일성(권태와 일탈, 부정과 긍정, 금기와 허용의 변증법적 조화)에 주목하고 이 아름다운 통일성을 거울로 어설픈 개념화와 자연의 수탈로 점철된 문명의 악마적인 속성을 정확하게 비춰낸 작가였으며, 동시에 최첨단의 문화적 삶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한국문학사의 일면적인 성격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비판한 '한국문학사의 반성적 거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류보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