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란 생태계 내부의 일이다. 생명들은 저마다 생태계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두고 경쟁자와 다툰다. 이들의 자리 다툼은 당사자 스스로 다툰다는 의식을 가지고 이뤄지기도 하고, 그저 본능대로 행동한 것에서 결과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다툼에서 이긴 생명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퍼트리고, 결과적으로 진화가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생명들은 생태계 내의 숱한 다른 생명들과 여러 관계를 맺게 된다. 어느 초원에 형성된 생태계를 상상해보자. 이곳의 초원에는 들소와 양, 염소와 야생말이 풀을 뜯어먹으며 살고 있고, 이들을 사냥하는 늑대와 곰, 호랑이 등이 있다. 들소와 양, 염소 사이에는 같은 먹이인 풀을 두고 경쟁 관계가 성립한다. 풀이 한없이 풍부하게 있다면야 다행이겠지만 한정된 풀을 놓고 싸워야 한다면 이들 중 누군가는 먹을 풀이 부족해질 것이다. 풀을 차지하지 못한 일부 개체는 풀에서 눈을 돌려 나뭇잎을 먹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뭇잎을 먹기에 적합한 구조로 진화가 일어난다. 경쟁이 진화를 촉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먹고 사는 포식동물 사이에도 경쟁이 일어난다. 먹이가 될 동물을 더 잘 사냥하는 종은 번성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종은 사라질 것이다. 그중 일부는 나뭇잎을 먹는 형태로 진화한 초식동물을 주된 먹이로 삼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진화가 일어난다. 진화의 시작은 아주 작은 변화일 것이다. 그 변화는 무시되기도 하고, 다수는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개체수를 늘리면 변화는 고정되고 진화가 된다.
풀을 먹다가 나뭇잎을 먹기 시작한 초식동물로 돌아가 이들의 내장을 살펴보자. 이전과 다른 먹이가 들어오자 여기에선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된다. 장에 사는 수많은 균들은 서로 더 빨리 새로운 음식을 분해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그리고 이런 경쟁의 와중에 공생체의 면역작용과도 싸워야 한다. 이전과 다른 분해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뜬금없이 새로운 포식자가 등장했으니 나뭇잎에 독을 섞기도 하고, 가시를 달기도 한다. 삶의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는 필요가 없었던 변이가 새로운 무기가 된다. 진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동물과 식물의 체내와 체외에 기생하는 생물들이 있다. 아무리 작은 개체라도 기생생물이 없는 개체는 없다. 어느 정도 크기의 동물이나 식물이라면 최소한 10여 종류 이상의 기생생물들이 있다. 이들 숙주와 기생체 사이에서도 피나는 사투가 진행되고, 그 결과는 각각의 진화로 귀결된다.
이렇듯 생태계의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진화는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생물들에게 연달아 진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생태계 내에서 홀로 진화하는 생물은 없다. 진화는 한 생물에겐 진화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다른 생물에겐 진화의 시작이다.
생명은 무릇 일종의 질서다. 개체를 유지하는 질서가 깨지면 개체는 죽는다. 마찬가지로 생태계도 일종의 질서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균형을 잡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만이 생태계는 질서 있게 유지된다. 그러나 개체의 항상성도, 생태계의 평형상태도 조용히 균형을 잡고 삶과 생태계를 지탱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이 만드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 평형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이들은 끊임없이 오르고 내려가는 과정을 겪고 있으며, 평균적이고 확률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주의 질서는 이러한 평형상태가 영원히 유지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개체에서의 동적 평형은 수시로 깨지고, 변태와 노화를 통한 변화를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종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종 안의 수많은 개체들은 다 다르다. 돌연변이가 생기고, 격리가 일어나고, 유전적 부동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화가 일어나고 종분화가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멸종이 예외 없이 기다리고 있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흙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의류나 작은 풀들이 시작하는 생태계는 조금씩 흙이 깊어지고, 식물의 종류도 변한다. 식물의 종류가 변하면 그곳에 거하는 동물의 종류도 바뀔 수밖에 없다. 동물의 종류가 바뀌면 동물에 기생하는 기생동물들도 변화한다. 식물들은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극상climax에 도달한다.
하지만 극상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 홍수와 가뭄, 지진과 해일, 화산 폭발과 같은 현상들이 생태계를 한순간에 무너트린다. 가벼운 일격은 몇 년에 걸쳐 회복이 가능하고, 깊은 일격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복구가 된다. 생태계는 개체나 종에 비해 그 생명이 길다. 끈질기다. 개체보다 종의 수명이 길듯, 종보다 생태계의 수명이 더 길다. 하지만 생태계라고 영원하진 않다. 열대우림은 사막이 되고, 고원은 산악지대가 된다. 이렇듯 생명이 존재하는 장소는 ‘변화’만이 영원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생물들 간의 관계를 바꾸고, 또한 진화를 요구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여러 책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진화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결과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공진화도 마찬가지다. 꽃이 나비와의 공진화를 ‘미리 생각하고’ 나비가 자신과 공진화할 꽃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로지 다양한 변이 속에서 살아남아 많이 번식한 종의 자손이 진화의 결과로 주어질 뿐이다. 혹시나 이 책에서 진화를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비유일 뿐이다. 어떤 절대자에 의해 정해진 방향으로 가는 것은 진화가 아니다. 공진화에서 같이 진화할 상대는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번 책은 이런 ‘관계 속에서의 진화’를 보려고 했다.
먼저 책의 앞부분은 바다의 작은 영역에서 단순한 세포 하나로 시작된 생명이, 30억 년의 세월을 거치며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게 하는 진화의 역사를 공진화란 키워드로 살펴본다. 광합성을 하고, 진핵생물이 되고, 포식과 피식 관계가 만들어지고, 공생과 기생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균과 세균들이 육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공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포자에서 씨앗으로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의 관점에서 이들과 관계 맺는 균, 세균, 동물과의 공진화가 어떻게 다양성을 만들어내는지를 살펴보겠다.
책의 뒷부분은 지구 생태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공진화를 확인해본다. 먼저 기생과 공생의 공진화, 경쟁과 포식, 피식의 공진화를 알아본다. 나방과 박쥐와 올빼미가 밤하늘을 날게 되고, 개미와 진딧물, 나무 사이에 얽힌 기생과 공생, 포식과 피식의 관계 맺음 등 다양한 공진화의 사례를 통해 인간 사회보다 더 복잡한 생태계의 내밀한 사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지구와 생물권 사이의 공진화를 확인해본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순환, 지층의 형성과 산호초, 석회암 절벽의 비밀을 파헤치고, 마지막으로 인류가 여타 생물들과 이루어가는 공진화를 확인해보자. 불행하게도 생태계의 암적 존재가 되어가는 인류의 슬픈 현실을 마지막으로 두었다.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