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의 넋두리가 남동풍을 타고 갈매기처럼 이리저리 허공 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종일은 마치 알 수 없는 자신의 출생비밀과 현재 도망다니고 있는 자신의 숙명이 어쩌면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속적으로 공허한 독백을 허공 속에 쏘아대고 있었다. 그러나 종일은 앞으로 자신이 그토록 동경해 왔던 바다 건너 먼 나라로부터 얼마나 커다란 시련을 당하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27p 밤하늘에는 자신이 충청도 작은 산골에서 지내다가 어느새 바다 한복판에서 바닷물고기를 잡겠다고 서 있는 한 사람의 풋내기 선원으로 변모한 자신을 발견하고 한편 놀라고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 뱃사람으로서 고생할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그래, 겨루어 보는 겨. 내 운명하고 한번 신명나게 붙어보는 겨.” 그날 밤 결국 종일은 선실에서의 잠이 처음인지라 어쩔 수 없이 새우잠을 잘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 p.38
애타게 부르는 종일의 외침소리에도 순이는 아랑곳없이 벌써 저만큼 뛰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순이의 모습은 마치 들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내리는 눈발 속에서 저만큼 사라져 갔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순이의 뒷모습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종일의 아랫눈시울이 살며시 젖어들었다. “그려, 선생님 되어 주면 될 거 아녀……. 그까짓 선생님 되는 게 뭐 대수라고…….” 종일은 순이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용기를 내어 독백을 늘어놓았다. --- p.54
애처롭게도 종일은 안병장이 사주한 깡패들의 심한 몽둥이질과 다리 밑에 버려질 때의 충격으로 인하여 그만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다. 불행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멀쩡하던 두 눈도 어느새 시력을 차츰차츰 다 잃어가고 있었다. “잘 생각이 나지 않네요.”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기억을 모두 잊어먹었으니 딱해서 어쩐담……. 가엾게시리…….” ‘진덕’이라고 불리는 긴 머리 아가씨는 동네에 5일장이 설 때마다 부러진 뼈마디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홍화씨를 사다가 연신 종일에게 달여 주었다. --- p.299
종일은 안 병장 가게를 천천히 걸어 나와 손에 쥔 ‘콜트’ 권총에 장전된 15발을 대서양 밤바다를 향하여 쏘았다. “탕! 탕! 탕!…….” 시원했다. 그리고 종일은 아무런 미련 없이 ‘콜트’ 권총과 안 병장 품안에서 나온 권총 모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다음날 종일은 존 F케네디 공항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p.356
“가녀린 옷깃을 살며시 스치며 인연이라는 실 한 오라기 무슨 사연 있었기에 날개를 펼치고 어느 날 나비처럼 나의 인생에 날아들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수없이 접었다 펼친 나의 인생 역경 속에는 그래도 사랑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있었기에 꿋꿋이 견대낼 수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