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십여 년 간 다수의 잡지사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고, 현재는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하며 소설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선의 취향』이 당선됐고, 장편소설 『런던의 안식월』로 제1회 ‘K-오서 어워즈’를 수상했다. 『런던의 안식월』의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성석제로부터 ‘자기 연민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도구인 성찰과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오아라가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청담동 명품 편집숍인 마인더숍 매장 앞이었다. 우울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그녀가 찾는 곳 중 하나였다. 평일 오후의 마인더숍은 한산했다. 오아라는 이곳에 올 때마다 외계 행성에 온 느낌이 들었다. 외계인이 청담동 한복판에 뚝 떨어뜨리고 간 듯한 기하학적인 외관은 언제 봐도 인상적이었다. 세계 최고라 칭송받는 이탈리아의 한 건축 장인은 오랜 기간 리뉴얼을 통해 이곳을 단순한 명품 편집숍에서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가장 농밀한 알레고리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야릇한 위압감과 경외감을 놀라운 황금 비율로 형상화해냈다. 그래서 이름값은 중요하다고 오아라는 생각했다. --- p.14
필사적으로 믿음의 대상을 찾으면 찾을수록 삶은 열심히 비아냥거리며 오아라를 희망의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거나 무릎 꿇렸다. 마인더숍에서 봤던 벤틀리의 뒷모습, 훔치고 싶은 디올 백, 청담 파라곤의 웅장한 정문, 김중권의 BMW 가죽 시트, 겐조 옴므의 향기, 로열 코펜하겐 찻잔. 오아라는 자신에게 진정한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는 대상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물……. 한데 속물이 뭐 어때서. --- p.33
오아라는 생각했다. 뭔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더 이상 이대로는 삶을 지속시킬 수 없다고. 무심코 주머니에 넣었던 오아라의 손에 사각의 빳빳한 종이가 딸려 나왔다. KY성형외과 대표원장 김중권. 오아라는 복화술 하는 사람처럼 명함에 적힌 글자를 소리 없이 따라 읽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삶이 이래서는. --- p.36
기꺼이, 행복하게, 나를 가두라. 그리고 나의 것이 되어라. 나를 너의 것으로 만들라. 더 격렬히, 아낌없이. 오아라는 주술사처럼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 p.76
김순옥은 쇼핑백에서 꺼낸 돌체앤가바나 원피스를 들고 가 옷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간호사 옷과 경찰 제복 등이 일상복 틈에 섞여 걸려 있었다. 둘이 이러고 노는 것일까. 김순옥은 타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함부로 욕할 마음까지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코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전신 거울 앞에 선 채로 원피스를 자신의 몸에 대봤다. 이 옷을 걸치고 오아라처럼 교태를 부리면 윤석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p.179~180
가난한 작가가 오피스걸이 된다는 설정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흥미로울 듯했다. 다만 이것이 세상을 향한 커밍아웃이 되지 않을까 일말의 염려가 앞섰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곧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그것은 독이 든 성잔이 될 것이다. 독배는 받고, 마시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그것이 독배란 것만 경계한다면. --- p.207
오랜 샤워를 마친 후 공들여 메이크업을 하고 돌체앤가바나 원피스로 갈아입은 그녀는 디올라마 백을 꺼내 들고 발렌시아가 선글라스를 착용한 후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탄 오아라는 서울 시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로 가는 동안 몇몇의 남자들이 선글라스를 낀 채 로비를 가로지르는 오아라를 흘끗거리며 지나갔다. 10층으로 올라간 오아라는 복도 끝 1021호를 찾아 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