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하지만 아르센 뤼팽이라면? 아르센 뤼팽 앞에서 과연 대문짝이든 도개교든 벽이든 존재하기나 할까? 아르센 뤼팽이 한번 목표를 정했다면, 제아무리 기발한 장애물도 물샐틈없는 조심성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127쪽)
“한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소, 가니마르. 난 그녀를 사랑했지.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알고 있소? 다른 건 내게 전혀 중요치 않았소. 맹세하오. 그래서 지금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거요.” (1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152쪽)
“보드뤼든 다른 누구든 되어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오. 개성을 마치 셔츠를 갈아입듯 바꾸고, 외모와 목소리, 눈빛, 필체 따위를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 말이오! 하지만 문득 그 모든 모습 가운데서 진짜 자기 자신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 그땐 몹시 서글퍼진다오. 지금도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1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186쪽)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네! 한시도 위험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심지어 나는 보통 사람들이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위험을 호흡한다네. 시시각각 자신을 에워싸며 소리를 지르고 미행을 하며 때로는 와락 다가드는 위험의 징조를 간파해내지. 그러니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우니까. 이에 비견될 수 있는 감정이라면, 뭐랄까……. 자동차 레이스를 하고 있는 운전사의 심정이랄까?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한나절이면 끝나지만, 나의 레이스는 평생을 이어지지.” (1권, 『뤼팽 대 홈스의 대결』, 466쪽)
빅투아르 : 네 머릿속에서 도둑질 생각을 말끔히 씻어줄 묘안이 하나 있긴 해……. 바로 사랑……! 사랑이 너를 변화시킬 거야. 나는 확신하고 있어. 사랑이 너를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게 할 거라고……! 너는 결혼을 해야 해!
뤼팽 : (생각에 잠겨) 그래요…… 어쩌면…… 그게 나를 완전히 다른 남자로 만들지도 모르죠. 당신 말이 맞아요…….
빅투아르 : (표정이 환해지며) 정말? 너도 같은 생각이야?
뤼팽 : 네.
빅투아르 : 좋았어! 괜한 허세는 이제 그만이다! 하룻저녁 파티에나 어울릴 아가씨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진짜 여자…… 평생을 같이할 여자를 말하는 거야!
뤼팽 : 알겠어요.
빅투아르 : (뿌듯한 표정으로) 어머, 얘 좀 봐…… 제법 진지하구나! 너 사랑하는 사람 있지?
뤼팽 : 네. 진정한 사랑요.
(중략)
빅투아르 : (활짝 웃으며) 아, 사랑스러운 녀석 같으니! 정말 대견하구나……! 그래, 하는 일은 뭐라더냐?
뤼팽 : 아, 그거요…… 도둑이에요! (1권, 「아르센 뤼팽, 4막극」, 841-842쪽)
2권
“이보시오, 젊은 친구. 지금 문제는 어떤 표현을 고르느냐가 아니오. 문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 확고한 사실이 어떠냐이지요. 바로 이런 것 말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내겐 당신만 한 위력을 가진 상대가 없었소. 가니마르와도 셜록 홈스와도 나는 마치 어린애를 데리고 놀듯 놀았을 뿐이오. 한데 당신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방어하고, 심지어 뒤로 물러설 필요성까지 느끼고 있단 말이오. 좋소이다. 지금 당신과 나의 관계에서 내가 패배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소.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아르센 뤼팽을 이겼다는 게 세간의 생각이니까요. 한데 그런 상태를 유지하려던 내 계획이 지금 완전히 뒤엎어진 상태요. 그냥 얌전히 어둠 속에 남겨두려던 것을 당신이 자꾸만 들춰냈기 때문이오. 당신은 그렇게 늘 나를 귀찮게 하고,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소.” (2권, 『기암성』, 130쪽)
“이젠 그녀도 죽었어. 그러니 피에르는 다시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 셈이지. 당연히 내가 정해준 대로 주느비에브와 결혼할 거고! 그러고 나서 그는 대공령을 접수해 통치하게 될 거야! 결국 주인은 나지만 말이야! 아, 유럽……. 유럽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거라고!”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해 쾌활해진 그는 열에 들뜬 채, 승리를 구가하며 세상을 호령하는 상상의 지휘검(指揮劍)을 뽑아 들고 이리저리 요란하게 휘두르면서 길을 걸어갔다.
“뤼팽, 너는 왕이 될 거야! 왕이 될 거라고, 아르센 뤼팽!” (2권, 『813』, 854쪽)
뤼팽 어차피 정식으로 자네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나로서도 별로 켕길 것 없겠지. 부당하게 얻은 재산은 별 가치가 없다는 것, 앞으로 명심하게나…… 물론 내 경우에는 다르지만 말이야! (2권,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910쪽)
“이보게, 뤼팽. 이번 사건에 자네가 개입해서 논증해준 내용 말일세. 솔직히 나는 그 편지에 그리 놀라진 않았었네.”
“아하, 그런가? 이유는?”
그는 차분하게 반문했다.
“이유야 그와 유사한 사건이 70~80년 전에 이미 일어났었기 때문이지. 그걸 가지고 에드거 앨런 포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한 편의 주제를 삼지 않았던가! 사정이 그러하니 이번 수수께끼의 해답이 쉬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2권, 「암염소 가죽옷을 입은 사나이』, 932-933쪽)
3권
“매사에 가장 힘든 점은, 목표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일에 착수하는 것 자체이지. 아, 이번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어느 길을 골라 가야만 하는가?” (3권, 『수정마개』, 43쪽)
“맙소사! 양은 얼마 안 되지만 꽤 쓸 만은 한걸그래! 국민의 대리인께서 취향이 제법이시군. 오뷔송산(産) 안락의자가 네 개에다……. 그리고 이건, 단언하건대, 페르시에?퐁텐의 서명이 분명한 책상이고……. 구티에르의 벽걸이용 등잔 받침 두 점에다……. 프라고나르 진품 한 점하고, 미국 억만장자라면 생각도 않고 눈독을 들일 만한 가짜 나티에 한 점……. 한마디로 대단한 재산이로군! 세상엔 여차하면 진품 타령만 해대는 까다로운 인간도 많지만, 전부 나처럼만 노력하라고 해! 나처럼 열심히 찾아다니라고 하란 말이야!” (3권, 『수정마개』, 20-21쪽)
때는, 이미 유명해진 뤼팽이 아직은 그의 가장 끔찍한 격전을 치르기 전, 그러니까 ‘기암성’이랄지 ‘813’ 같은 엄청난 모험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아직은 프랑스 제왕(諸王)의 수 세기에 걸친 보물을 제 것으로 삼는다거나, 독일 카이저(皇帝)의 바로 코앞에서 유럽을 도둑질할 생각일랑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좀 더 소박하고 이해할 만한 잔재주를 부리는 데 만족하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천성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저 취미 삼아 그때그때 선행과 악행을 경쾌하게 뿌리고 다니면서 일상에 울고 웃는 돈키호테의 나날……. (3권, 『아르센 뤼팽의 고백』, 362쪽)
미망인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날카롭게 웃어젖혔다.
“오호호호호, 어때 이만하면 된통 한 방 먹은 거 아닌가? 천하에 둘도 없는 뤼팽께서, 왕초 중에 왕초께서 말이야! 감히 범접할 수도 없고, 신출귀몰 포착할 수도 없는 귀신같은 존재가 이렇게 한낱 아녀자와 풋내기가 쳐놓은 함정에 걸려들고 말다니! 그것도 아주 고스란히 꼼짝 못하게 말이야! 손발이 꽁꽁 묶이고 보니 허약해도 이렇게 허약해빠진 친구가 없군그래.” (3권, 『아르센 뤼팽의 고백』, 480-481쪽)
4권
“오늘 밤이오! 오늘 밤! 오늘 밤 터질 거란 말입니다. 두고 보세요. 이빨 자국이……. 아, 무서워라! 아, 고통스러워요! 제발 살려주세요! 독(毒)입니다, 독! 날 좀 살려주세요!”
그는 점점 잦아드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연신 무슨 악몽 속에서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빨…… 희디흰 이빨들…… 이빨을 악물어요!”
목소리는 이내 시들시들해지면서 퍼렇게 질린 입술 사이로 맥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입술은 마치 끊임없이 새김질이나 하고 있는 늙은이의 말라비틀어진 입처럼 속절없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개가 천천히 가슴 위로 숙여지면서, 두세 번 크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한 차례 심한 경련을 일으킨 다음 그대로 축 늘어졌다. (4권, 『호랑이 이빨』, 22쪽)
제발 부탁입니다. 그 여자를 구해주세요. 당신에겐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네, 당신은 전능한 사람이에요. 그동안 티격태격하면서 당신이란 존재에 대해 많이 깨달았습니다. 내 공격을 막아낸 건 당신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기적 같은 행운이 당신을 집요하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보통 남자들과 다릅니다. (4권, 『호랑이 이빨』, 297쪽)
아직은 시간이 있다, 뤼팽. 전투에서 손을 떼어라.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죽을 거야. 자네가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나를 향해 감히 공세를 취하든지, 승리의 함성을 지르려고 입을 여는 바로 그 순간, 자네 발밑에서 엄청난 심연이 아가리를 쩍 벌릴 것이네. 자네가 죽어야 할 곳은 이미 정해진 상태야. 그럴듯한 함정이 준비되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네, 뤼팽. (4권, 『호랑이 이빨』, 409쪽)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란 항상 지나친 확신 때문에 실족(失足)을 하는 모양입니다그려. 그들은 때로 자신들의 적수가 자기들이 지니지 못한 특별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4권, 『호랑이 이빨』, 551쪽)
“일단락되었다는 얘기인지요?”
“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도 말했지요. ‘내 무덤 위에 이렇게 새겨주길 바라네. 협객, 아르센 뤼팽 이곳에 잠들다.’ 그저 통 큰 소리 같지만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는 정녕 모험의 대가라고 할 만하지요.” (4권, 『호랑이 이빨』, 581쪽)
“지금처럼 침울한 시대에는 더더욱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인데, 바로 멋진 웃음 말입니다!” (4권, 『호랑이 이빨』, 582쪽)
5권
“폴, 늘 그렇게 잊지 마세요. 죄는 반드시 벌을 받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 인생이 증오로 얼룩진 기억 속에서 억눌려 있는 건 원치 않아요. 이제 우린 둘이잖아요! 서로 사랑하고 있고요. 미래를 바라보세요.” (5권, 『포탄 파편』, 34쪽)
베르나르 당드빌은 다소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요, 폴. 벌써부터 난 정신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야말로 예언력과 투시력을 죄다 겸비하신 것 같아요! 두말 않고 곧장 파 들어가야 할 곳을 지목하지를 않나,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술 털어놓지를 않나……. 당최 모르는 것 하나 없이, 죄다 훤하게 내다보잖아요! 정말 그 정도이신 줄은 몰랐어요! 혹시 아르센 뤼팽을 사사(師事)라도 한 거 아니에요?”
폴은 순간 멈칫하며 되물었다.
“왜 하필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건가?”
“뭐요, 뤼팽 말이에요?”
“그래.”
“맙소사, 그냥 해본 소리예요. 혹시나 무슨 관계라도 있나 해서…….” (5권, 『포탄 파편』, 235쪽)
“네……. 당연하지요. 이 전쟁에서 불구가 된 용사들은 결코 스스로를 소외됐다거나 박복하고 추한 미물로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도 당당한 정상인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상인 말입니다! 다리 하나가 없는 거요?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머리가 모자라거나 가슴이 뜨겁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전쟁이 내게서 다리 하나와 팔 한 짝을, 아니 두 팔과 다리 모두를 앗아갔기로서니, 내가 과연 매몰찬 거부와 쓸쓸한 동정심이 무서워 누구를 사랑할 권리를 아예 포기할 것 같습니까?” (5권, 『황금삼각형』, 395쪽)
정말이지 끔찍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옛날 다른 두 사람이 겪었던 시련마저도 사실은 자신들이 치른 것이며, 그때 이미 한 차례 죽은 다음, 지금 다시 똑같은 악조건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시련의 과정을 고스란히 겪어가면서 말이다. 자신들의 운명과 부모들의 운명이 어찌나 닮았는지, 고통은 배가될 수밖에 없고, 이제 그 두 번째 시련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절망감이 처절하게 몰아쳤다. (5권, 『황금삼각형』, 585쪽)
--- 본문 중에서
6권
“그렇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까마득한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며 이곳 사레크의 모든 삶을 지배해온 예언이지요. 사람들이 늘 생각해온 게 바로 이겁니다. 즉, 언젠가는 운명의 날이 와서, 그로부터 열두 달 내에 섬 주위에 솟아난 서른 개의 큼직한 암초가 서른 개의 관으로 돌변해, 결국 서른 명의 끔찍한 희생자를 거두게 되고, 그중 넷은 십자가형에 처해질 여자의 몫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전통으로 굳어졌단 말입니다. 요정 고인돌에 새겨진 시구(詩句)처럼, 아주 확고하게 규정된 사실이지요. ‘서른 개의 관(棺)에 서른 명의 희생자가 있으리니…….’ ‘네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리니…….’” (6권, 『서른 개의 관』, 180쪽)
조르주 : 오, 사립탐정으로 나서도 굉장하겠습니다! 맞아요, 책을 빌려주었죠!
당드레지 : 영어책이겠죠. 저자명은 C로 시작하고…….
조르주 : 뭐라고요?
당드레지 : 하하, 놀라기는…… 서가의 영어책 중에서 저자명 C로 분류된 항목에 빈틈이 생겨 있지 않소! 별것 아닙니다!
조르주 : 하여튼 정확해…….
당드레지 : 여자의 키가 작다고도 말했던가요……? 책에 손이 닿으려면 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만 했을 테고…….
조르주 :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당드레지 : 의자쿠션에 신발자국이 남아 있더군요.
조르주 : 아……!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그 모든 걸 파악한 겁니까?
당드레지 : 처음엔 몰랐죠. 특별히 관심 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근데 당신 태도가 조금 민감하다 싶어서, 다시 주변을 쓱 둘러보았죠. 그러고는 곧장 파악한 겁니다. (6권, 『아르센 뤼팽의 귀환』, 497쪽)
“삶이란 원래 그런 겁니다. 눈을 똑바로 뜬 채 탐구하는 자세만 견지한다면 말입니다. 모험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오두막 안이든 가장 무난해 보이는 사람의 표정 아래서든,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볼 생각과 찾을 마음만 있다면 도처에 널려 있는 게 바로 열광할 핑계거리요, 선행을 쌓을 건수이며, 희생자를 구하고 불의에 종식을 고할 기회들이랍니다.” (6권,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548쪽)
7권
“당드레지는 내 어머니 쪽 성인데, 미망인이 된 후 결혼 때문에 거의 의절하다시피 해왔던 가문의 강권으로 뒤늦게 되찾은 성이라서요.”
“그건 또 왜죠?”
뜻밖의 고백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클라리스가 다그쳐 물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는 욥처럼 가난한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렇죠. 일개 교사로 살았소. 뭘 가르쳤냐고? 체조하고 펜싱, 복싱도 좀 가르쳤지!”
“그럼 당신의 진짜 이름은 뭐죠?”
“오! 좀 천박한 이름입니다, 클라리스.”
“어떤 이름인데요?”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요?”
“그렇소, 별 멋대가리도 없죠. 차라리 확 바꿔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클라리스는 적잖이 난처한 기색이었다. (7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23-24쪽)
남자의 어깻죽지를 백작부인은 덥석 붙들었고, 위압적인 반말투로 냅다 내질렀다.
“젊은이, 자넨 뭐냐고 물었어! 도대체 자넨 뭐지? 이왕 이렇게 된 것, 자네도 패를 몽땅 펴 보여야 하는 거야. 자네 누구야?”
“내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요.”
“헛소리! 자넨 아르센 뤼팽이야. 자네 아버지는 테오프라스트 뤼팽이지. 복싱 및 사바트 교사직과 더불어 그보다는 좀 더 벌이가 되는 사기꾼이라는 직업도 겸임하다가, 끝내는 붙잡혀 유죄판결을 받고 미국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저세상으로 떠났지. 자네 어머니는 도로 처녀 때 이름을 달고, 머나먼 사촌뻘인 드뢰수비즈 공작 댁에서 가난한 친척으로 얹혀살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공작부인께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보물 하나가 분실된 걸 발견했지. 다름 아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저 유명한 목걸이 말이야. 온갖 수사를 시도했지만, 결국 그 엄청난 대담성과 악마 같은 재주를 발휘해 일궈낸 도둑질의 주인공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누구 짓인지 잘 알고 있어. 바로 자네였단 말이거든. 그때 나이 여섯 살이었지.” (7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 132-133쪽)
“이건 또 뭐야? 당신 누구요?”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소. 까짓, 아르센 뤼팽이라 해둡시다. 당신의 이 소소한 실패담을 기억에서 꺼낼 때마다 프티그리보다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그나마 기분 덜 상할 테니까.”
루발의 떨리는 손끝이 밖으로 나가는 출입로를 가리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을 지나쳐,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또 봅시다, 장관 나리. 아, 그리고 충고 한마디 더 드리죠. 행여 본인의 영역 밖을 넘볼 생각일랑 관두시는 게 좋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노는 분야가 있는 법이에요. 그냥 법률만 다루고, 정치놀음이나 열심히 하세요. 그 밖에 범인 때려잡는 일은 나 같은 전문가에게 맡기시고!” (7권, 「아르센 뤼팽의 외투」, 417-418쪽)
“그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그래봤자 소용없을 거예요. 당신은 전혀 모르는 이름일 테니까.”
“그래도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오라스 벨몽(Horace Velmont).”
“오라스 벨몽이라…… 그게 대체 누굽니까?”
“오라스 벨몽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숨어 지내느라 두르고 다니는 여러 이름 중 하나에 불과하지요.”
“숨어 지내다니, 누가 말이오?”
“바로 아르센 뤼팽 말입니다.”
“우하하하하. 내가 아르센 뤼팽이라고?”
라울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어머나, 당치 않으신 말씀! 난 그저 당신 모자 속 이니셜이 내 머릿속에 엉뚱하게 연상시키는 이름들을 댔을 뿐인걸요. 그리고 또 이런 한심한 생각도 해봤답니다. 당신의 그 앙증맞은 라울 드 리메지라는 이름이 역시 아르센 뤼팽의 가명 중 하나인 라울 당드레지와 너무도 닮았다고 말입니다.” (7권,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 440-441쪽)
8권
“그나저나 일단 보수는 얼마면 되는지부터 정해야겠죠?”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바네트가 당차게 내뱉자,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슨 명예 때문에 하는 일은 아닐 텐데요?”
“우리 바네트 탐정사무소는 완전 무료봉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답니다, 남작부인!” (8권, 『바네트 탐정사무소』, 15쪽)
“이보게, 베슈. 정말이지 우리의 공조 노선은 지금까지 풍요로운 결실만을 거두어왔네. 그간 숱한 모험을 멋지게 해치웠을 뿐 아니라, 그때마다 내 호주머니를 짭짤하게 부풀리는 데도 적잖은 공헌을 해왔어. 그래서 말이네만, 이제는 왠지 자네를 대하기가 좀 껄끄러워지고 있네. 고생은 함께했으면서 재미를 봐온 건 나이니까 말이야. 이봐, 베슈. 이참에 아예 나와 함께 같은 사무소에서 동업하는 게 어떻겠나? 바네트와 베슈 탐정사무소! 어때?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베슈는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여태껏 그토록 한 사람을 미워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 값을 테이블에 던지고는 웅얼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이따금 저 인간이 진짜 악마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니까.”
그걸 또 얼추 새어 들은 바네트도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하긴 나 역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8권, 『바네트 탐정사무소』, 178-179쪽)
“자, 오늘 여러분 앞에서 어떤 여인이 모호하고도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밤에 혼자 정원을 거닐었다느니, 자신이 차를 마시러 가는 대신 이웃 친구에게 건너와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느니 말이죠. 그런가 하면, 여러분 머릿속에 질투와 격정으로 눈먼 한 미친 여자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간담이 서늘한 음성으로 이렇게 전화를 하는 여자 말입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거야. 오직 그 여자만이 우리 사랑의 장애물이지. 내가 그토록 애원해도 당신이 막무가내인 건 바로 그 여자 때문이었어.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곧 장애물이 제거될 거야!’ 이상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이 여러분 보기에 더 그럴듯한가요?” (8권, 「부서진 다리」, 263-264쪽)
이번만큼은 길길이 악을 쓰는 파즈로의 방해를 멜라마르 씨도 막지 못했다.
“그래, 내가 누군데? 어서 대답해보시지! 대답해보란 말이야! 내가 누구지? 네놈 생각엔 내가 누구로 보여?”
장은 마치 손가락으로 셈을 하듯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자네는 가슴받이를 훔친 도둑인 데다…….”
역시 앙투안은 가만있지 않았다.
“거짓말! 내가 가슴받이를 훔쳤다니!”
장은 전혀 흔들림 없이 계속했다.
“응접실 물건들을 훔친 자이며…….”
“거짓말!”
“샹드마르스 공원의 벤치에서 살해당한 방물장수의 공범이자…….”
“거짓말 마!”
“로랑스 마르탱과 그녀 아버지와도 한패지.”
“거짓말이라니까!”
“요컨대 자네는 무려 75년에 걸쳐 멜라마르 가문을 괴롭혀온 잔인무도한 혈통의 계승자야!”
그쯤 되자, 앙투안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매번 폭로가 거듭될수록 부르르 몸을 떨고 목청은 더더욱 높아졌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8권, 『불가사의한 저택』, 465-466쪽)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숙한 시간이었다. 라울이 예견한 바가 과연 옳을 것인가? 정말 저 수초들과 섬세한 조약돌들이 즐비한 개천 바닥에서 몽테시외 씨는 자신의 더없이 소중한 황금가루를 거둬들였던 것인가?
드디어 베슈가 일을 끝내고서 사내끼를 들어 올렸다.
금속 망 속에는 조약돌과 얼기설기 엮인 수초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분명 황금가루와 그 조각들이었다. (8권, 『바리바』, 764-765쪽)
돈 루이스 : 올가, 결심에 변함은 없는 거요?
올가 : 그럼요.
돈 루이스 : 잘 생각해요. 나는 매우 격렬하고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인생이 위험천만하고 불확실한 남자예요. 처절한 오늘과 암울한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올가 : 당신을 사랑해요.
돈 루이스 : 나를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올가 : 절대로 가만두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돈 루이스 : 저자한테 평생을 충실하기로 약속한 것 아니었소?
올가 : 자정까지만 그러기로 한 거예요.
돈 루이스 : 좋아요! 0시 15분부터 그대는 내꺼가 되어 있을 겁니다!
올가 : 이미 나는 당신꺼예요. (8권, 「이 여자는 내꺼야」, 803-804쪽)
9권
둘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보았다. 남자는 불가해한 진상을 조금이나마 엿보려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여자는 수치스럽고 비참한 몰골에 힘겨워하며 중얼거리는 분위기였다.
‘아직도 나를 원합니까? 사람을 죽인 여자를 곁에 두시겠어요? 내가 당신 품에 안겨도 됩니까? 아니면 이대로 사라져줄까요?’
마침내 여자가 전신을 후들거리면서 속삭였다.
“죽을 용기가 없었답니다. 그러고는 싶었어요. 몇 번이나 물 위를 굽어보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용기가 안 나더군요.”
남자는 그런 여자를 정신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심지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거의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서 뜯어보고, 또 뜯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야 문제가 적나라한 형태로 대두되는 느낌이었다. 즉, 지금 이 순간 클라라는 라울의 면전에도 있고, 동시에 경시청 감옥에도 있다는 사실! (9권, 『두 개의 미소를 가진 여인』, 222-223쪽)
숙녀 : (완전히 냉정을 잃은 표정) 수사판사…… 아, 어떡해…… (덱체어에 앉아 훌쩍인다.) 아, 이제 난 끝났어! 다 끝났다고…… (다시 결연한 목소리로) 그래, 난 아무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 아이는 못 건드려……! 나야 할 수 없고…… 그 아이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없다고……!
신사 : 어서 샌들 벗어주시죠!
숙녀 : (고개를 들어 신사를 쳐다본다.) 그런 다음은요?
신사 : 미국인에게 돈을 돌려주는 거죠……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사건종료!
숙녀 : 네? 정말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신사 : 당신이 하도 예뻐서……. (9권, 「아르센 뤼팽과 함께한 15분」, 323쪽)
여자의 아리따운 맨어깨가 그렇지 않아도 하늘하늘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튜닉 의상 밖으로 화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여자는 열정 어린 얼굴로 빅토르에게 간청했다.
“이 남자를 좀 설득해주세요! 나도 가고 싶단 말이에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위험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아니, 위험을 넘어 공포를 사랑해요. 세상에 그렇게 사람의 존재를 온통 휘어잡아버리는 현기증 나는 감정보다 더 가치 있는 건 없다고요. 나는 두려워하는 남자는 영 질색이랍니다. 그건 비겁한 데 지나지 않거든요. 하지만 내게 두려움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도취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고요!”
빅토르는 여자를 향해 짓궂게도 혀를 차는 시늉을 한 다음 앙투안 브레삭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 이와 같은 공포에의 탐닉을 치료해줄 최선의 방법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든 공포심을 느끼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일이 없다는 걸 실제로 보여주는 겁니다. 당신과 내가 둘 다 이처럼 감싸고도는 한, 이 여자분은 결코 그런 깨달음에 도달할 리가 없어요.”
그제야 브레삭도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쳇! 정 그렇다면 여자 하자는 대로 해봅시다! 혼 한번 나보라죠 뭐!” (9권, 『강력반 형사 빅토르』, 531쪽)
10권
거기에는 흡사 어떤 도당의 우두머리나 폭군이 수하들에게나 내렸을 법한 강력한 명령조의 글귀가 한 줄, 아니 두 줄 적혀 있었다. 고고한 필체에 굵고 묵직하게 꾹꾹 눌러쓴 티가 역력했다. 아뿔싸, 처음 보는 순간 라울은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 라울 스스로 악마 같은 존재로 불렀던 여자의 필체를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늘 가공할 지시를 아랫사람에게 내릴 때, 언제나 사용하던 그 여자의 거만하고 혹독한 어투를 어찌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세 번씩이나 라울은 다음과 같은 끔찍한 글귀들을 읽고 또 읽었다.
아이를 도둑으로, 가능하면 살인자로 만들라.
그래서 나중에 제 아비와 맞서게 하라. (10권, 『백작부인의 복수』, 138-139쪽)
“왜냐하면 내 인생을 정리했거든. 더 이상의 격한 모험은 없어요! 빅토르 시절의 모험과 칼리오스트로가 여자와의 실랑이가 정녕 마지막일 거요. 이젠 나도 지긋지긋해요! 재산은 두둑하게 간수해두었으니 더 이상 덜컥거리지 않고 억만장자 귀족 나리로 여생을 편히 보내렵니다. 게다가 이제는 여자들도 지겨워! 사랑도 이젠 그만! 난봉꾼 노릇도 더는 관심 없어요. 감상적인 기분이나 달밤의 세레나데도 모두 다 지긋지긋하고. 모조리 싫증났단 말이오! 자, 어서 풀 먹인 셔츠하고 제일 근사한 의복이나 내오시오!” (10권,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334쪽)
“자고로 뤼팽은 타인의 사유재산권은 별로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것에는 누구든 절대 접근 불가를 고수하는 타입이지요. 세상 어느 놈이든 자기 재산에 눈독을 들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그는 노발대발할 사람입니다. 아주 사나워지지요.” (10권,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364쪽)
정숙함이란 편협한 우상과도 같아, 그 부정적인 계율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획일성을 특징으로 하지. 반대로 명예란 무척 개인적인 것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서든 진부한 도덕률에 부합하느냐 마느냐를 따지지 않고도 자신만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를 누린단다. 명예는 단념하라고 말하는 대신 행동하라고 주문한다. (10권,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543쪽)
“두말할 나위 없이 거절이오! 당신네 정책은 도처에 전쟁을 퍼뜨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소. 반면 나는 전 세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뿐이오. 그렇소, 내가 앞으로 몸 바쳐 추구할 야망이 바로 그것이오. 평화란 말로만 떠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평화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올 거예요. 그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기여할 생각입니다. 당신네 국민의 패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10권,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6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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