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저는 고양이가 밖으로 나가는 걸 말릴 수 없습니다. 탄이라는 검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암컷답지 않게 광범위한 영역을 갖고 있어 한번 나가면 하루 이틀은 돌아오지 않을 때도 종종 있는 데다 평생(경상이지만) 두 번의 사고까지 겪어 많이 걱정하게 만들었죠. 2년 반에 걸쳐 위암을 앓으면서도(마지막엔 간부전이었습니다만), 탄은 죽기 일주일 전까지 밖에 나가 영역을 순찰하고, 새를 잡고, 바람 냄새를 맡고, 흙 위를 뒹굴거리다가 2년 전 벚꽃이 지던 계절에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겨우 7년 남짓한 생애였지만 마음대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하게 해준 고양이였습니다. 바깥 세계에서 탄은 확실하게 배 이상 살았지요. 고양이가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안 해.’
굉장히 슬프긴 하겠지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만한 각오를 갖고 오늘도 밖으로 나가는 고양이를 배웅합니다. --- p.31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양이 각자의 개성과 삶을 존중해서 차이를 두는 겁니다. 바깥 고양이와 어울릴 때는 어디서 이 ‘선’을 그어야 할지 늘 생각해둬야 합니다. 아픈 바깥 고양이를 한없이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가 치료비 때문에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이나, 모든 고양이를 끌어안고 집 안에 열 마리가 넘는 고양이를 두었다가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래선 인간에게나 고양이에게나 불행할 뿐이겠지요. --- p.85
“절망하지 마!”라고 해도 인간의 정신은 동물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하죠. 공포와 집착,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나 현재의 환경, 인간관계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될 겁니다. 하지만 단순하기 때문에 고도의 무언가를 이뤄내는 인간 이외의 생물들에겐 항상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걷고 싶어! 먹고 싶어! 살고 싶어!’ 그것만으로도 어떤 장애를 가진 동물이라 해도 오직 오늘을 살아나가고 있으니까요. --- p.119
보통 쇠약해진 동물은 가능한 한 어둡고 조용한 곳에 몸을 숨기려는 습성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죽는 거죠. 보호하려고 해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사람 손이 닿지 않는 틈으로 도망쳐 들어가 포기해버린 적이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길고양이 중에도 가끔 이런 애가 있어요. ‘살아남을 마지막 수단은 인간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걸 아는지 굳이 모습을 보여주는 고양이가요. 날 때부터 사람과 사는 재능과 운명을 가진 ‘약속의 고양이’입니다. --- p.147
그래도 미코린은 돌아왔어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는데 몇 미터 거리를 필사적으로 걸어와 제일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겁니다. 겨우 2년 몇 개월. 아무리 잘 보호해준다 해도 바깥 고양이의 생명의 무게는 이 정도입니다. 그럼 ‘들꽃’을 잘라 집 꽃병에 넣으면 행복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미코린은 우리 집 정원에 묻어주기로 했습니다. --- p.199
하지만 뉴스에서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소중한 고양이를 뺑소니로 잃은 경험을 가진 저는 ‘이해해, 분하지!’ 그렇게 진심으로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 아이를 잃는 것에 비하면 고양이를 잃는 슬픔은 100분의 1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00배로 만들면 ‘1’이 됩니다. 인간이든 개나 고양이든, 이 상실의 경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100배로 하든 1000배로 하든 그대로 0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시로미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 p.215
그리고 우리 집은 고양이들에게 있어 중세의 민중에게 개방된 사찰, 즉 아시아적인 절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보시하고,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처마 밑에 병든 사람이 있으면 최소한의 약을 주고, 죽어가는 사람에겐 최대한 편히 갈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그중에는 멋대로 처마 밑에 눌러앉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인연이 되어 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는― 앞으로도 고양이들에게 그런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
---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