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곳의 우리는 사진 속 피사체가 겪는 참혹한 일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의 현실에서 우리를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값싼 눈물과 분노다. 우리는 참혹한 현실에 화를 내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위무하고, 현실에서 등을 돌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광주가 재현되는 방식 역시 대개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사진과 영화, 소설에서 잔혹한 계엄군과 인간미 넘치는 시민군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보기 원하는 광주의 기억은 과잉 재현되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은폐되었다. 우리는 죽어가는 순박한 시민군과 착한 유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렸고, 먹먹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 밖으로 나와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실 우리의 분노와 눈물은 광주의 역사를 대면하는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의 학살과 그 해부학적 참상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대신, ‘적당히 참아낼 수 있는 정도’의 기억을 선택한다. 즉 이것들은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만든다든가, 광주에서 죽은 ‘영령’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식으로 ‘봉합’하는 것들이다. 광주를 그렇게 규정한 후에 우리는 일상으로 도망갈 수 있는 것이다.---p.195
그의 이러한 질문들로 인해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서술하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식의 통념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지금도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근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신화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성찰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물음을 내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예술의 재현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사진은 과연 기억을 위한 기계인가? 망각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철 지난 질문을 던지면서도 미적 긴장감을 놓지 않는 사진가는 한국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노순택이 도달한 곳은 한국 사진의 어떤 최대치 중 하나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사진 속 망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다. 서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망자들은 사진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아마도 영원히 평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일어났던 공간은 기념물이 될 것이고, 살아있는 자들은 망자를 등에 업고 자신의 목청을 높일 것이다. 졸지에 민주화의 영령이 되어버린 망자들은 과연 이런 일들을 즐거워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녕 지옥의 풍경이 아니겠는가.---p.199
모르겠습니다. 제가 광주작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실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월의 죽음을 영웅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맥락의 죽음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나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를 엄습하고야 마는 잿빛 내일이 아닐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초라한데, 학살자들마저 죽음 앞에선 무기력한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는가, 이런 자괴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 모두가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타인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핑계가 될 수는 없겠지요. 슬라보예 지젝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빠르건 느리건 결국 우리에게 도달하는 유일한 편지, 우리들 각자를 결코 틀릴 수 없는 수신인으로 발송되는 편지, 그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이 편지가 우리를 찾아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한에서만,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 그 편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의무 같은 것이, 그 편지를 먼저 받은 사람들, 어쩌면 내가 받아야 할 편지를 대신 받은 건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기억과 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p.215
하지만, 그런 어설픈 알리바이가 나중의 작업, 예컨대 책을 출판하거나 이른바 ‘화이트 큐브’에 전시하는 일에 ‘선의’를 부여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사진에 선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할 잣대는 없다고 봅니다. 사진은 결국 맥락에 의존하는 텍스트일 뿐이고, 어느 맥락에 사진을 놓을 것인가, 어느 맥락으로 사진을 읽을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지요. 사진은 결코 착한 매체가 아닙니다. 어떤 ‘선의’도 쉽게 ‘악의’로 변질시킬 수 있고, ‘악의’마저 ‘선의’로 포장할 수 있는 교묘한 매체이지요. 하지만 그 선악의 판단 기준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이 놓인 맥락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숨은 채 비겁하게 셔터를 누르고, 사악하게 조형성을 추구합니다. 이 ‘비겁하고’, ‘사악한’ 과정은 대단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진이 생산되는 지극히 기계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모를까, 찍기로 판단했다면 그 물리적이고 조형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지요. 중요한 지점은 생산된 사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의 문제인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최초의 맥락 이후 사진은 부유합니다. 선의의 맥락에 놓였던 사진도 그와 무관한 맥락에 놓일 수 있고, 심지어 악의를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사진의 함정이라 부를 수도 있고, 반대로 가능성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진 자체에 선의를 판가름할 잣대가 내재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담는 사진의 생산과 사용에 관한 중단 없는 사고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p.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