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의 이름은 안성환이었다. 처음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일가족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천천히 읽던 그의 눈이 한 구절에 박힌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망자의 인적사항 중 한 가지가 그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들었다.
부친이 김구 선생님과 연관된 일로 수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경찰에 보호 요청을 했으나 기각된 적이 많음.
다른 사람과 달리 육감이 좋은 그의 머리에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우연한 교통사고와 피해자의 과거사가 겹쳐오자 영 퀴퀴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해냈다. 김구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문서에 거론된 김구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형사 특유의 직감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걸 느꼈다. 묘한 사건에 흥미를 느낀 유찬은 바로 안성환의 교통사고에 관한 모든 문서를 넘겨받아 천천히 훑어보았다. 5일 전 새벽 2시에 포이동 외진 길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삼호물산 바로 정면 횡단보도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읽어볼수록 묘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목격자들의 말은 서로 일치했다. 분명히 안성환이 탄 차는 정차하여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뒤에서 달려오던 덤프트럭이 강하게 충격을 주어 차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죽었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차의 사진을 바라보던 유찬은 낡은 차지만 중형차가 저렇게 부서지려면 덤프트럭이 얼마의 속도로 달려와 부딪쳐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속 60킬로미터 정도로는 저렇게 처참히 부서질 리 없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유찬은 다시 한 번 문서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훑어보면 훑어볼수록 이상한 예감은 더욱 구린 냄새를 맡게 만들었다. 일단 머리가 아파진 유찬은 서둘러 점퍼를 입고 사고가 났던 현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현장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으나 사고를 표시하는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먼저 일명 스키드마크라고 불리는 타이어 자국을 찾아보았다. 대형트럭이 얼마만큼의 속도로 달렸는지를 바로 보여주는 단서였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서 스키드마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타이어 자국이 나타난 곳은 엉뚱한 곳이었다. 승용차를 박살 낸 채 무려 30여 미터를 끌고 간 후에야 브레이크를 잡은 듯 스키드마크가 나타나 있었다. 정신을 산책 보내지 않은 이상 이상한 현장 상황이었다. 유찬의 눈빛이 묘한 광채를 뿜어냈다. 강력반 형사 특유의 직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냄새가 나긴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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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하나였다. 양심이 꺼리는 길은 가질 말아야 한다. 역사는 준엄하다. 당장은 저들이 득세한 채 민족의 정기가 무너지더라도 결국은 사필귀정이리라. 대자연의 세월에 비한다면 인간의 일생이란 그야말로 촌각이었다. 역사 앞에 당당하게 얼굴을 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기억하는 후세인이 있다면 알리라. 자신마저 시류에 굴복한다면 그 유산도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는 처음으로 간절하게 바랐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땅을 뚫고 피어나 울창한 수풀을 이루는 찬연한 조국의 내일을 피 토하는 심정으로 기원했다. “선열의 영령이시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피신다면 마지막 하나만은 지켜주십시오.” 그 심정으로 펜을 들었다. 떨리는 펜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마음의 소리를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며 써 내려가는 손길에 가는 떨림이 흘렀다.
이제 얼마 후면 한민족의 역사가 바뀔 터이다. 수많은 피가 흐를 테지만 결코 물러서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지금 흘리는 피는 나중에 강이 되어 흐를 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터이다. 우렁찬 민족의 함성을 위해 오늘은 울어야 한다. 나는 결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한 행동을 미워할 뿐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용서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란 준엄한 것이다. 한 번 잘못 어긋나면 그 역사를 바로잡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오늘 흘릴 피를 두려워한다면 내일은 피의 강이 역사에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뒤틀어진 개울물은 돌리기 쉬워도 강이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내가 두려운 건 암담한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그 일에 내 목숨과 동지의 피가 필요하다면 제단에 바치리라.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이 비밀만은 기필코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 조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한 나 김구의 작은 선물이다. 하늘이여! 이것만은 지켜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유찬의 얼굴은 한마디로 침통 그 자체였다. 한 인간의 족적을 따라간 길은 너무도 험하고 힘들었다. 신념(信念)! 그 단어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역사의 파도를 맞아가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선인의 발자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문득 떠오른 한 생각에 절로 존경의 염이 일어났다. 쉬운 길을 버리고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하게 살아간 김구의 어깨에 드리워진 무게가 얼마일까? 권력을 눈앞에 두고 고개를 돌린 심정은 어떠할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권력도 버리고 신념으로 살다간 영혼에게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김구에 대해 검색하니 역시였다. 다음 날 김구는 안두희에게 암살당해 이승을 떠나야만 했다. 이 일지는 김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심정을 써놓은 글이었다. 민족의 지도자 한 명이 추악한 권력의 힘에 힘없이 스러져갔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답답해지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목이 타는 갈증이 일며 차가운 공기가 그리워졌다.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고뇌한 김구 선생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을 내려다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목숨을 걸고 이루려던 열망은 아무 데도 보이질 않았다. 이 차가운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또 한 번의 죽음을 주는 건 아닐지 양심이 저려왔다. 절로 답답해져오는 가슴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독립투사였으나 모종의 힘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안민준의 아들 안성환이 평범해 보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안민준은 경교장(해방후 김구 선생의 집무처)에서 일을 하던 사람. 사건을 담당하게 된 경찰 유찬은 사건을 조사하다가 이 사건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님을 알아내고 그 진실을 파헤치고자 친구 경배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조사한다. 어느 정도 사건이 진척되면서 유찬은 모종의 집단에 습격을 당하고, 숨겨진 키워드를 찾아낸 친구 경배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드러나는 김구와 친일파 간의 알력 싸움. 그리고 한국전쟁 등의 파국과, 친일파의 득세로 인한 비극적 미래를 예감한 김구 선생의 안배로 작성되는 비하인드 백범일지와 그 부속 자료들. 비하인드 백범일지가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친일파 후손 세력의 공격이 본격화되고, 유찬을 도우는 과거 의열단 후예 세력까지 나타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