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법칙 01
누군가를 차야 할 때, 먼저 차는지, 차이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물증이나 증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허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상대의 기본 데이터는 미리 확보해두는 것이 좋다.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완벽 방어를 위해.
대체 소개팅이란 걸 한 지가 언제였지? 옛 남친과 헤어질 때만해도 무한 공급될 것 같았는데…. 소개팅이 뚝 끊긴 지 두 해가 넘은 오늘에야 나는 후배가 큰맘 먹고 소개시켜준 킹카를 기다리고 있다.
“키도 크고, 남자답게 생겼어. 요즘 음악잡지 쪽에서 최고로 잘나가잖아.”
후배의 말마따나 약속시간이 15분이나 지나도록 잘나간다는 킹카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감이 좋지 않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카페 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며 킹카가 나타났다.
“어이쿠, 많이 기다리셨죠? 제가 인터뷰가 있어서….”
진작 일어났어야 했다! 드르륵 의자를 끌며 내 앞에 앉는 존재는 킹카는커녕 인간이 아니었다. 심심산골에서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산짐승! 바로 그것이었다.
얼굴을 뒤덮은 턱수염도 모자라 21세기에 상투를 틀다니! 그것도 그루밍이라 할 수 없는 완전 자연산. 수염 한 올이 직경 5밀리미터 철사 같고, 덩치는 늦가을 불곰 저리 가라다. 게다가 본인은 빈티지라고 주장할, 넝마 일보 직전의 모직 재킷과 군복 바지. 소개팅은커녕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그러나 30분 후, 난 서소문의 고깃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고깃바람에 얼굴을 그을리고 있었다. 최고의 맛집이라며 그가 날 보쌈했기 때문이다.
“몇 킬로그램이나 나가세요?”
정말 할 말이 없어 묻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몸을 쭉 훑어 내리며 말했다.
“188센티미터에 97킬로그램입니다. 근육 때문에 다이어트를 해도 체중이 줄지를 않아요. 수영, 야구, 농구 같은 운동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미미 씨는 딱 제 반만 하네요. 전 그런 여자가 귀엽더라고요. 흐흐흐.”
천억 분의 하나, 그와 결혼을 한다면 난 틀림없이 복하사腹下死다!
“고기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그는 5분 안에 갈빗살 4인분을 후루룩 ‘마시고’ 있었다.
“요전 회식에서 편집장이 마음껏 먹으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혼자서 꽃등심 백만 원어치를 먹었죠. 편집장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하하. 여기 이모는 손이 커서 좋아요.”
이모! 나왔다. 아저씨 전용 어휘.
“미미 씨는 주로 어디서 놀아요?”
무섭다. ‘나와바리’부터 체크하는구나.
“마감 끝나면 그냥 집에 있는 편이에요. 왜요?”
“흐음, 취미가 그 사람을 말하잖아요. 저는 인디음악에 애정이 각별해요. 제대하고 3년 동안은 음악에만 매달렸죠. 그 덕에 이 길로 들어섰고요. 요즘 홍대 록 신Rock Scean이 많이 침체돼서 상당히 디프레스드depressed해요”
산짐승이 살던 산은 외국에 있나 보다. 슬슬 말 속에 영어가 툭툭 섞이는 걸 보니.
“참,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갔었어요? 요즘은 블랙홀이나 시나위 때보다 오히려 더 치열해요. 미미 씨는 어떤 밴드 좋아합니까? 그루비한 쪽?”
밴드라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슈퍼주니어랑 빅뱅요. 강인이랑 동해 너~무 좋아하고요. 빅뱅에선 탑이죠.”
쿠르르릉! 순간 번개라도 친 듯 다운되는 분위기. 사실을 말하는 것도 죄가 되나?
“그런 쪽은 이제 졸업하고 스트록스The Strokes나 화이트 스트라입스The White Stripes 같은 그룹 거 들어봐요. 아주 칼칼한 게 맛깔스러워요. 음악에 대한 시야가 확 트일 겁니다.”
그는 거만한 눈빛으로 기타라도 치듯 떡가래 같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자기가 잉베이 맘스틴이야? 스트록스 매니저야? 난 이런 타입을 잘 안다. 그는 ‘자칭 문화남’이다. 외모, 돈, 정의감, 센스, 지적 능력… 아무것도 내세울 건 없지만, 특정 문화에 박학다식한 척함으로써 상류층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남자들. 그러나 그 밑바탕엔 꽃미남과 킹카에 대한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난 슬슬 심사가 제대로 꼬이고 있었다.
“미미 씨, 와인 하시죠?”
입가의 기름을 핥으며 그가 물었다.
“네, 네? 가, 갑자기 와인은 왜…?”
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내겐 와인에 관한 아픈 기억이 많다.
“제가 와인 칼럼 쓰는 거 몰랐어요? 와인 마신 지 10년 넘었죠. 직접 시음회 주최한 지도 3년쯤 됐고요. 저는 와인 없으면 밥을 못 먹어요.”
난 산짐승도 싫어하지만 와인은 더욱 싫다. 그리고 와인 전문가인 척하는 산짐승을 가장 싫어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와인을 너무 안 마셔요. 요즘 와인 붐이라고 떠드는데 아직도 일본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한식 먹으면서도 가볍게 한잔하는 풍토가 빨리 자리 잡으면 좋을 텐데.”
그의 주문에 고기를 나르던 ‘이모’가 와인과 글라스를 가지고 왔다. 코르크를 따고, 잔을 돌려 향을 맡고… 혼자서 생쇼를 하던 그가 “패션잡지에서 일하시니까 와인 많이 아시죠? 이거 괜찮을 겁니다.”라며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와인을 따랐다. 그런데 까만 병에 커다랗게 쓰인 1865란 숫자!
“1865? 어머, 백년도 넘은 와인인가 봐요. 정말 오래됐다!”
난 변죽이라도 맞춰야 할 것 같아 살짝 놀라는 척을 해줬다. 순간 그의 얼굴이 살인마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져 보였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이후 나는 아예 입을 닫았고, 그는 인디밴드, 북유럽 록, 60년대 히피 문화,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딴생각을 하려 해도 “내 말 틀려요? 맞잖아요.” 하며 확인사살을 하는 통에 1시간 동안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먹지도 않은 갈빗살 8인분 값을 나눠 내고(이럴 때만 남녀평등이지?) 고기와 술 냄새에 찌든 머리카락을 털며 내린 결론은 하나.
‘이건 강간이야!’
“별로 안 늦었는데 정동 길 산책이나 할까요? 걷는 거 좋잖아요. 요즘 여자들 너무 안 걸어서 탈이에요.”
“어쩌죠. 저도 택시 없인 못 살거든요. 어, 저기 택시 왔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다 잡은 먹이를 놓친 산짐승의 황당해하는 모습이 사이드미러에 가득 찼다. 드디어 해방이었다!
난 그렇게 그를 찼다… 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코드가 맞지 않았다. 그의 덩치와 식견에 꽂힐 여자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난 아니다. 난 상투보다 젤 바른 소프트 울프커트가 좋고, 그루비한 취향을 강조하는 남자보다 말발은 떨어져도 춤추는 게 귀여운 남자가 좋다. 1톤에 가까운 덩치보다 힘없어도 슬림한 꽃미남이 우선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걸려온 후배의 전화는 날 경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선배, 왜 그랬어? 오빠가 선배 패션잡지 기자 아닌 것 같대. 생긴 건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너무 무식하다고. 와인 이름이 1865인 걸 1865년산이라고 했다며?”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찼어. 내가 먼저 집에 갔다고!”
아연실색한 난 미친 듯이 외쳐댔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동료들은 이미 날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간발의 차이로 난 무식해서 차인 불쌍한 노처녀가 된 것이다.
산짐승은 치사하고 비열했다. 인디밴드와 와인으로 본색을 숨기고, 자기가 차인 상황을 정반대로 위장해 뒤통수를 치다니! 후배가 이렇게 빨리 쪼아대는 걸 보면 엊저녁 잽싸게 전화해 선수를 쳤을 게 분명했다. 내 평생에 와인 좀 모른다고 차인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자칭 와인 칼럼니스트란 그에게는 아주 좋은 꼬투리였으리라.
너무나도 분해 이빨이 저절로 갈렸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로 차였다면 조용히 코나 풀었지. 하지만 이건 아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