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은 매사에 ‘알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당하고 불의한 일에 부딪혔을 때 바꿀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과감히 용기를 내는 것이 ‘알맞음’이요, 도저히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선은 순응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힘을 기르는 것 또한 ‘알맞음’이다. 이처럼 매 순간의 상황을 깊이 고려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용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한 선택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이도저도 아닌 산술적인 중간을 택하는 것도 아니다. 중용은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 p.30
도둑이 올 때마다 매번 쫓아내느니 애초에 못 들어오게 튼튼한 담을 쌓는 것이 더 현명하다. 몸가짐을 삼가 삿됨을 예방하는 것은 담을 쌓는 일과 같다. 담이 집을 지키듯, 삿됨을 막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 그 담도 허물 수 있어야 한다. 담이 필요한 것은 초심자에 한해서다. 자유를 위해선 우선 자율이 필요하나 때에 따라서는 그 자율마저 넘어서는 유연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 p.40
허물을 인식하려면 먼저 배움이 있어야 한다. 허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문제의식을 품는다는 뜻인데 이는 배움에서 비롯된다. 나를 모르면서 나의 허물을 알 도리는 없다. 사회를 모르면서 사회의 허물을 인식할 수 없다. 페미니즘을 모르면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든 게 그렇다. 그래서 공자 학단은 호학(好學), 즉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중시했다. 겸손했던 공자가 배움을 좋아하는 것에 관한 한 천하에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을 정도다. --- p.52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은 ‘나’ 중심을 부정했던 공자의 철학과 상통한다. 2500년 전 공자가 서양의 현대철학자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공자가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배운다는 것은 타인의 주장과 의견 그리고 다른 시대, 환경의 사상과 지식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공자가 지금까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이렇게 자기 시대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 p.63
소인은 내면은 그대로 두고서 외면에만 신경을 쓴다. 남이 볼 때만 슬쩍 선을 흉내 낸다. 그러나 군자, 즉 고수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언젠가 탄로 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위선이 득이 될 리 없다. 신독을 해야 하는 이유다. --- p.83
예는 하늘의 이치를 본받은 인간의 법칙을 말한다. 흔히 예의범절이라고 할 때의 그 예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법칙이다 보니 딱딱하다. 나누고 구분하는 성질을 갖는다. 반면 음악은 결속력을 품고 있다.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흥얼거리고 춤추다 보면 어느새 각자가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예와 음악, 즉 예악을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수양할 때는 물론 나라를 다스릴 때도 이 둘을 중시했다. --- p.88
도라는 것은 오직 내게 달려 있지만, 욕망은 환경과 타인 등 여러 여건에 달려 있는 것이라 마음먹은 대로 채울 수 없다. 도를 좇으면 즐겁지만 욕망을 좇으면 미혹될 뿐 즐겁지 않은 이유다. --- p.98
사단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인데,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고 해치는 자다. 통치자가 사단에 근거해 정치를 펼치려는데 훼방을 놓고 패권 정치를 권하는 자가 있다면 그 역시 통치자를 해치는 자다. 사단을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차 확산시킨다면 가히 온 세상을 품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단을 그저 마음속에 묵혀 둔다면 부모를 봉양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 게 뻔하다. --- p.109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인을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는 마치 국궁과 같다. 축구와 야구는 상대편의 실력과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국궁은 오직 자기 실력에 달렸다.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 p.115
사람의 마음도 우산(牛山)과 같다. 본래 인의가 있지만, 도끼로 나무를 베어 내듯이 인의를 해치고, 산에 가축을 방목하듯이 욕심만을 풀어 기르니 인의의 마음이 자랄 길이 없다. 다행히 본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은 싫어해 인간다움에 가까울 뿐이다. --- p.121
박중빈은 평소에 흰콩과 검은콩을 들고 다니면서 ‘유념’했을 때는 흰콩, ‘무념’하고 지나쳤을 때는 검은콩을 주머니에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칠 때 주머니 속 콩의 수를 헤아려 그날 하루 자신의 마음공부 상태를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냥 마음속으로 마음 챙김의 중요성을 되새기기보다는, 유무념 공부 같은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마음을 다잡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p.128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해서, 신체가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유적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을 잃는 건 결코 아니다. 마음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때, 즉 내 마음이 본성과 어긋날 때 인간 본질을 잃는 것이다. --- p.131
맹자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아끼는 몸을 둘로 나눠 마음을 또 다른 몸으로 설정한 것이다. 마음은 큰 몸[大體]으로, 신체는 작은 몸[小體]으로 말이다. 맹자는 작은 것 즉 신체를 귀하게 여기느라, 큰 것 즉 마음을 해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 p.134
보이는 그대로의 것을 사실이라 하고, 종합적으로 이해해 보게 된, 그 사실 너머의 것을 진실이라 부른다. 사유란 이 진실을 읽는 힘이다. 사유의 대표적인 방법이 역지사지다. 상대방 처지에 서 본다는 것은, 단편적으로 대상화하던 타자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사실에서 진실로 나아감이다. 이를 맹자는 마음 기관을 작동해 사유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대인이라는 것이다. --- p.140
삶과 의로움 중 의로움을 선택한다는 것은, 돈을 훔칠 수 있는 상황에서 훔치지 않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이로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 이웃을 헐뜯으면 이익을 얻는 상황에서도 이웃을 헐뜯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아픔을 주면서까지 나의 성공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다. 크고 작은 여러 선택의 상황에서 본마음 즉 도심을 지키는, 자부심 있는 삶을 살자고 맹자는 권한다. --- p.149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물화’란 표현이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가 말한 ‘물화’와도 상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가치가 상품으로 여겨지고, 특히 사람마저 ‘노동력’이란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을 마르크스가 비판할 때 쓴 말이다. 정이는 사람이 본마음을 잃은 것을 물화라 표현했다. --- p.175
예부터 천지인(天地人)을 일컬어 세 기둥[三才]이라 했는데,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이 마음을 지닌 덕분이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 등 외물을 좇느라 이 마음을 잃는다면 세 기둥에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그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우리의 마음, 도심은 어렴풋하여 돌보기 쉽지 않은데, 여기에 온갖 욕망이 침범하면 견딜 도리가 없다. --- p.181
많은 이가 마음을 놓아 잃어버린다. 왜일까. 별게 아니다. 마음은 잠깐 한눈을 팔아도 잃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잘 보살피는 사람은 항상 자기 마음을 관조한다. 미미하게라도 나쁜 감정이 들 것 같으면 즉시 알아차린다. 그 순간 그 감정은 가라앉는다. --- p.189
사람이 도리를 저버리는 것은 밑바닥에 처하는 셈이다. 온갖 더러운 것이 그리로 모인다. 어두운 사람 곁에 어두운 사람이 모이는 법이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마음을 공경히 대하고 보살펴야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도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되며, 귀한 옥을 쥔 듯, 넘실거리는 물을 받들 듯 경건한 태도로 도리를 실천해야 한다.
---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