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고 부드럽다. 어떤 위협의 기운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토록 찬란한 날에 저 푸른 하늘이 내게 겪게 한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욕실이 태양의 홍수에 잠겼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아우성이 들려온다. 반짝이는 지평선이 보인다. 새들이며 다람쥐들……. 이렇게 좋을 데가. 이 목욕은 기적에 가깝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웠다고 할 순 없지만, 정신만큼은 완벽하게 추슬렀다. 예견된 두통도 오지 않았다. 나는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스시를 주문했다. --- p.11
오후 5시 무렵, 다시 강간범에 생각이 미쳤다. 불과 48시간 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내가 마르티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려, 상자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듯 문을 벌컥 밀치며 내 집에 침입했다. 불현듯 놈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놈은 호시탐탐 적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감시했던 것이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러 우편물을 챙기고 메모를 확인한 뒤, 전화 몇 통을 돌려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안나가 찾아 업무상 논의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자기 얼굴이 영 이상하네.” 나는 어리둥절한 체했다. “무슨 소리. 컨디션이 최상인걸. 오늘 날이 얼마나 화창해, 햇살은 또 얼마나 눈부시고.” 안나가 미소 지었다. 만일 내가 누군가와 의논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안나는 분명 가장 적절한 상대다. 우리는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저지했다. 내가 안나의 남편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일까? --- p.23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집 근처에 은밀하게 주차되어 있다. 나무에 아직까지 끈질기게 붙어 있는 무성한 이파리들로 반쯤 가려졌다. 이틀 연속이다. 어제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늘은, 준비되었다. 좀 전에 자동차가 주차되었을 때 해가 완전히 떨어졌고 나는 쌀을 헹구느라 창문 앞에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차 안의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을 만큼 사위가 어둡다. 달도 하늘 높이 드리워진 구름의 베일에 가려 한 귀퉁이만 모습을 드러낸 채 가늘고 파리한 빛만을 내뿜고 있다. 차종도 가려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운전석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신경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맹렬히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한 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두렵지 않다. 그동안 수차례 경험을 통해 더는 물러설 수 없을 때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상황이다. 나는 결연하다.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내게 오기를. 나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채 그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를 맞을 준비가 됐다 --- p.49
침실 창가에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귀가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차에서 내렸을 때, 노트북마저 끈 채 망원경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우리가 원만한 이웃의 징표로서 가벼운 손짓만을 주고받았던 때 내가 받았던 인상보다 훨씬 괜찮다. 그가 첫인상으로 내게 남긴 그 억지웃음의 사내보다 훨씬 쾌활하고 박력 있다! 나는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손쉬운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내로 나가서 보다 폭 넓은 선택을 하는 편이 훨씬 신중하다는 걸. 파트릭은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랄까. 꾸민 태도의 서글서글한 유형. 나르시시즘적이고 스스럼없으며 랄프 로렌을 입는 부류. 더 나은 상대를 찾기란 어렵지 않겠지만 그런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더러 손쉬운 해결책이야말로 지혜의 징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침실의 어둠 속에서 남자를 염탐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 p.74~75
내 손이 아직 입을 막고 있었을 때, 누군가 내게 왈칵 달려들며 나를 그대로 바닥으로 -카펫이 깔린- 넘어뜨렸다. 침입자와 함께 추락하며 나는 책상에 있던 전등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턱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침입자는 복면을 썼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더 한층 악을 쓰며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이번엔 그가 힘을 잘 쓰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날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그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의 무기소지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온힘을 다해 나를 짓누르며 내 목을 졸랐다. “사람 살려! 도와줘!”라고 악을 쓸 때마다 얼굴로 손이 날아왔지만 실신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거셌다. 그가 내 바지를 내리려 하는 동안 나는 책으로 가득 찬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서 등으로 땅을 밀며 그 반동으로 그의 정수리를 발로 찼고, 그렇게 그의 압박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 p.162~163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추악한 놀음을 수락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섹스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사실 나는 내가 지나치게 강인한 동시에 지나치게 나약할 뿐이지, 그리 이상하거나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놀랍기 짝이 없다. 고독의 체험, 지나간 시간의 체험이란 놀랍기 짝이 없다. 자아 체험이라고 할까. 가장 담대한 자들이 비틀거리는 법. 나는 비틀거린 것 이상이었다. 인정한다. 이따금 우리의 부둥킴을 다시 보기도 한다. 왠지는 몰라도 마치 내가 땅바닥을 구르며 격투를 벌이는 두 성난 남녀의 몇 미터 위에 붕 떠서 그 장면을 목도하는 기분이 된다. 나의 활약과, 나의 분노와, 나의 무시무시한 비명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바로 그 비명 때문에 벵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벵상이 내가 숨이 넘어가는 중이라고 착각했으리라.
--- 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