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을 하러 가는 길에 비치는 따사로운 태양은 마치 코스타리카, 마치 멕시코, 마치 스페인의 섬 어딘가, 먼 곳 어딘가로 떠나온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창문을 열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숲길을 달려 바다로 나갈 때 코끝에 느껴지는 비릿한 향은 매번 일정한 양의 행복을 선사한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안도감과 바다가 내 옆에 있다는 그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자질구레한 걱정과 불안을 잡아채 거센 바람 속으로 던져버려 바스러뜨린다. 그래서일까, 한여름의 바다는 바다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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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지는 것은 파도에 휩쓸려 단지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허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며 살아남으려고, 두려워하면서도 거센 파도를 피해 멀리멀리 이곳까지 나왔다. 내가 얼마나 강하게 삶을 원하는지, 살아보려고 애썼는지를 대번에 느끼는 순간이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주르륵 흐르는 물기의 따뜻함을 느끼며 아, 살아 있다는 것은 가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거구나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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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누구의 도움 없이도 서핑보드를 번쩍 들어올리는 팔뚝을 가지고 싶었다. 도도하고 신비로운 여배우의 얼굴보다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 속에서 환하게 웃는 타히티 섬의 어느 바다 여자 같은 말간 얼굴을, 가늘고 늘씬한 몸매보다도 거친 파도를 누르며 일어날 탄력 있는 허벅지와 강한 체력을 무엇보다 가지고 싶었다. 당연히 어느 때보다도 잘 먹으려 했고 잘 잤고 스스로도 이토록 건강할 수는 없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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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대로 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억울한 기분 같기도 했다. 비교 대상이 되는 일과 그에 따른 걱정과 끝이 없는 버팀 속에서 마음을 졸이거나 풀어지다가 예고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까싶어 막막했다.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직업이 자유로워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때때로 오로지 혼자라는 기분을 느껴야 할 때에는 그 사실이 더없이 무섭기도 했다.
‘나는 정말 내 삶에 만족하는 걸까?’라는 문장이 섬광처럼 번쩍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도돌이표처럼 매일을 그 속에서 소비했다. 일도 여행도 무엇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다.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이 이렇게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남은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즈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인연처럼 서핑을 만난 것이다.
--- p.83
모든 것이 꿈같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배우가 된 것도, 서핑을 하고 있는 시간도, 힘들었던 마음이 아물어 다시 아프지 않을 때에도. 돌이켜보면 불과 몇 년 전 일들이, 내가 겪었던 일이 마치 내가 겪은 게 아닌 것처럼 과거가 된다. 시간은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안에서 녹는 눈처럼 물이 되어 흐른다.
--- p.116~117
우리는 줄곧 만나 서핑을 했고 계속해서 첨벙대기만 하는 내게 그는 정성껏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은 서울에 돌아왔을 때, 그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대뜸 말했다.
“누나,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자기 생각을 누군가에게 명확하게 말하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땐 정말 분명하게 그 말을 했다.
--- p.142
카라반의 작은 공간에 몸을 맞추어 살다보니 정말로 필요한 물건말고는 무엇이든 없으면 없을수록 편했다. 물건이 최소화되어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무게가 덜해야 기름값도 절약되고 이동하기도 편했다. 옷가지들도 쌓여 있다 보면 곰팡이가 슬었다. 당장 입고 있는 옷말고 여벌의 옷 하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 p.180
정원 일을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서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의 나와는 다른, 나의 자유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어느 날,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내가 되려고 했던 무수한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큰 방향이 없는 시작을. 나에게 작은 울림을 주는 이 시간들을 아끼기로 한다.
--- p.217~218
그런데 나는 왜 늘 어디론가 떠나려 하는 것일까?
어떤 건축가는 집은 삶의 보석 상자라 했고, 어떤 건축가는 모든 해답이 자연 속에 있다고 했다. 자연 속에다 안락한 집을 만들었는데 나는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꿈을 이루었으니 다른 꿈을 꾸고 싶은 걸까.
---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