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겪는 심리적 질병과 장애를 통찰하는 블랙 유머
프랑스에서 알랭 로브 그리에와 미셀 우웰벡에 이어 공학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다 문단에 데뷔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알랭 모니에의 장편소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가 출간됐다. 1954년, 나르본느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뒤 현재 툴루즈 산업상공회의 컴퓨터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서른일곱 살에 첫 소설, 『파르포라고 서명하다』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후 지난 12년 동안 알랭 모니에는 8권의 작품을 클리마 출판사에서 연이어 출간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의 세계를 펼쳐왔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 애독자였던 그는 무엇보다 소설의 해법을 풍자에서 찾는다.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풍자는 단순한 패러디에 빠지지 않으면서 새롭고도 다양한 논쟁의 방식을 찾을 수 있게 해줍니다. 컴퓨터, 인터넷, 광고를 비롯해 모든 것을 비판하고 단순한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죠. 중요한 건 이런 비판들이 진부하고 작위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흥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유쾌하지 않거든요”라며 자신의 문학적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별히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냉장고를 통해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개인의 행동과 습관을 통쾌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냉장고들이 당신을 공격해 온다면!
냉장고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이오네스코의 「의자들」과 같은 부조리극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주인공 마리 브와에의 아파트에 고장 난 냉장고가 잘못 배달되면서 시작된다. 최고의 서비스와 신속한 수리를 장담하는 냉장고 판매사와 AS센터는 실질적으로 마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전화만 해댈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마리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소설가 친구와 마리의 유부남 애인, 새 애인과 동거를 시작한 친구 아니크 등으로 인해 마리의 아파트 안에는 냉장고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레온 가스 때문에 냉장고를 곧바로 사용할 수도 없어, 냉장고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마리는 단 한 대의 냉장고도 이용할 수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이러한 진실과 전혀 상관없이 마리는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로 방송을 타게 되면서 “프렌치 콜드 걸”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인권과 환경을 사랑하는 유명인사로 탈바꿈하여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을 통해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 엉뚱한 피해자들만을 양산해가는 현대 사회 모습을 익살스럽게 풀어낸 유쾌한 소설이다.
애인이 떠나갈 때 가장 행복한 그녀, 그 안에 담겨진 이율배반적 사랑과 현대의 고독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에서 알랭 모니에는 냉장고 사건과 맞물려 마리와 그녀의 유부남 애인, 소설가 등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 등을 통해 얼핏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풀어가며 깊이를 더해준다.
현대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맹목적 섹스가 사랑의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그것이 전부인 양 과장스럽게 한껏 극대화된 성적 쾌락을 채우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인 듯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가 발전할수록 소통이 단절되면서 사회 구성원의 고독은 깊어지고 있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이렇듯 도시인이 겪는 고독과 소통 부재, 본원적인 고독, 소외감, 박탈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애인이 자신의 집을 떠나갈 때 혼자 남겨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고 말하는 마리는 소설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낀 후 “당신, 아직 거기 있어요?”라고 반복하여 묻는다. 이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갈망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그녀의 진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원적인 고독은 섹스를 통한 쾌락이 아니라 삶과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창조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은 이렇듯 서구사회의 병폐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는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상징하는 냉장고라는 가전제품을 등장시켜 현대 사회의 소통 부재, 현대인이 겪는 소외감과 고독을 해학적으로 풀어가는 한편,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따금씩 화를 받아줄 상대가 필요하거나 평범한 여자처럼 행동하고 싶어질 때 찾는 유부남 애인과 늘 마리 곁에 머물며 변함없는 관심을 보여주는 소설가와의 사랑이 대비되면서 전개된다.
알랭 모니에는 현대인의 삶을 특유의 블랙 유머를 통해 날카로운 풍자로 묘사하는 데 만족할 뿐이다. 거기서 의미를 찾는 일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알랭 모니에의 소설 속, 현대 소비 사회의 소통 불능과 전혀 완벽하지 않은 컴퓨터 체계에 대한 풍자는 눈물 날 정도로 통쾌하다. 알랭 모니에는 절대 과장하는 법이 없다. 알랭 모니에는 사회학자나 철학자의 언어를 버리고 단지 전개되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무엇보다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 그리고 코믹한 효과를 극대화하는 갑작스런 톤의 변화가 눈길을 끈다. 이야기를 끌어가다 살짝 살짝 옆길로 새며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하면서도 절대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가로막는 법이 없다. 『냉장고를 수집하는 여자』의 등장인물들은 이렇듯 고민하고, 사랑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살아간다.
―어느 독자의 서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