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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 그때그때 판단하기 심층적인 원칙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태도, 봉합 ‘행복의 이론’과 ‘자유의 이론’이 가격 폭리 처벌법을 대하는 방식 ‘미덕의 이론’ - 샌델의 설명 노골적인 순환 본질을 파악하는 비법이란 없다 사안의 일면만 강조해 보았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판단 마비 난처해진 샌델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런 것뿐이라면? 2장 샌델, 공리주의를 엉터리로 비판하다 공리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가 효용을 담는 그릇 미덕을 담는 그릇 모호한 미덕 공리주의를 향한 엉뚱한 비판 “어딘가 불편하다”에서 “그 이론은 틀렸다”로 비약 샌델이 다루지 않은 공리주의의 문제점 샌델, 존 스튜어트 밀을 엉터리로 비판하다 3장 샌델과 자유지상주의 사이의 기묘한 관계 자유지상주의, 밑동 빼고는 괜찮은가? 노직 이론의 커다란 구멍 - 어떻게 소유하는가 사회 구성원 사이의 약속 선착순의 이념 로크의 단서는 실패한다 자발성과 재산권의 순환논법 새로운 세대의 문제 밑동을 자르지 않아도 노직의 논증은 무너진다 4장 샌델, 자유주의를 왜곡하다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면 절대적 소유권과 거래 결과의 무조건적 강제는 자기 결정의 원칙을 침해한다 모병제냐 징병제냐 대리모 계약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샌델의 해결책: “국가가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관점에 따라 자의적으로 달라지는 ‘본질’ 롤즈와 샌델 차등 원칙 ‘재능 공유제’라는 오독 “우리”라는 자아 수술대 위에서 장기 기증을 취소하려 할 때 일상의 자유지상주의 차등 원칙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본질적인 응분을 갖고 있는가? 차등 원칙의 현실적 필요성 5장 샌델 이론의 실체 목적론적 추론이라는 허상 샌델이 말하는 ‘정의의 한계’ 정치와 정치 참여 제멋대로 바뀌는 목적과 미덕 권리, 의무, 미덕 미덕의 언어 수단과 목적 뒤바꾸기 샌델이 생각하는 자유주의의 한계 자유주의의 핵심 - 좋은 삶의 필수 조건 진정성의 원칙과 타인의 지배에 대한 저항 무지의 장막 선택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강요된 윤리 공동체주의의 위험 집단적 책임 샌델은 자유를 모른다 공적 토론의 근거 결론 후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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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편집자입니다.
2014-01-07
아래 글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저자 이한 변호사와 책의 편집자가 나눈 대화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비판과 반론, 지적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묻고 들어보았습니다. 정치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편집자)
인터뷰 읽으러 가기 http://mizibooks.tistory.com/60 [목차] 1. 샌델의 목적론 2. 이론의 토대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 3. 샌델과 이한, 누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을까 4. 샌델의 이론 안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5.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미끄러운 경사면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 6. 샌델은 국기모독죄를 어떻게 생각할까 7. 자유주의자가 실업수당과 복지 제도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 8. 좋은 삶의 조건 9. 상대주의와 개방성의 차이 |
샌델은 미덕이 권리나 정의보다 우선한다고 본다. 권리와 정의의 내용은 미덕을 증진하는 질서 내에서 허용될 뿐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권리와 정의에 대한 보편적 원칙을 추구하는 기획은 그 자체가 공허하다. --- p.46
샌델에게 권리를 조정하는 적절한 기준은 “정치 공동체 전체의 미덕을 얼마나 잘 증진시킬 것인가?”이다. 공동체의 관점에 따라 미덕의 실현 정도를 판단한다. 개인은 공동체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미덕을 담는 그릇이 된다. 샌델의 목적론은 공리주의의 효용을 미덕과 탁월성으로 대체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탁월성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된다. --- p.67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난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좋은 삶에 대한 확신은 개인의 합리적인 사고와 검토를 통해서 가질 수 있다. 반면 공동체주의는 좋은 삶에 대한 확신은 개인이 사회가 승인해주는 내용을 따름으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즉 좋은 삶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기제가 개인의 등 뒤에서 작동한다. --- pp.93~94 신체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명제는 매우 강력하다. 아마도 노직이 내세운 명제들 중에서 가장 강력할 것이다. 샌델은 이 강력한 명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이상 국가의 과세는 깡패의 강탈과 똑같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 돈과 내 팔다리는 동등한 차원에서 나의 소유물”이라는 주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p.117 샌델은 차등 원칙을 발판 삼아 롤즈를 공격한다. 그의 공격은 『정의란 무엇인가』 7장에서는 불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샌델의 박사 학위 논문 『정의의 한계』를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자. 샌델이 만 29세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논문의 원제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이다. 그러나 이 책에 가장 적절한 제목은 자유주의와 내 독해력의 한계이다. 농담이 아니다. 철학자마다 주장이 당연히 다를 수 있고, 또 박사 학위 논문이라면 독창성이 중요한 요소이므로 새로운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적어도 주장의 전제가 오독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 p.186 결국 사람들이 서로 독립된 주체라는 점을 부인하고, “우리”라는 형이상학적 괴물이 존재하며 개인은“우리”에 참여하는 부분적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주의적이다. --- p.194 자유주의자는 지배를 거부함으로써 좋은 삶의 필수적 여건을 확보하려 한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국가가 결정한 좋은 삶이 개인의 판단권을 찬탈하는 것을 정치로 규정한다. --- 본문 중에서 |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2년,
130만 한국 독자들은 '정의'를 찾았는가? 흥미진진한 딜레마 뒤에 숨은 위험한 주장과 허술한 철학, 거품에 가려진 마이클 샌델의 철학을 본격 해부한다. 직관과 감성에 항복하는 일을 멈추고 냉철한 이성을 갖춘 시민이 되기 위한 진짜 정의론!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본격 정치교양서이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철학적 방법론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예시들 뒤에 숨겨진 주장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논증한다. 독자들은 정의론의 대가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이 실제로는 정의의 ‘한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서 뚜렷한 정의론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논리에 기반한 이성적인 문장은 정치철학의 진면목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마이클 샌델의 베스트셀러『정의란 무엇인가』의 구성을 따라가면서, 샌델이 엉터리로 비판하고 왜곡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복원하고, 그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옹호한다. 또한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와 경쟁하는 주요 사상 조류인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샌델의 곡해를 걷어내고, 정치철학의 거장들이 제기한 아이디어들의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샌델의 (공동체적 자아를 상정한) 목적론적 철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의 정치적 지위를 허물어뜨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한다. 더불어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 재산 소유권의 한계, 징병제와 모병제의 문제, 과거사에 대한 집단 책임의 문제, 탄소배출권 제도, 의무 투표 제도, 재능 공유제 등 다양하고 풍부한 정치철학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 질문 “허리케인 피해 지역의 상인들이 물건값을 올려 받는 게 왜 문제지?” 답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폭리을 취하는 건 지나친 탐욕이야!” 질문 “상품권을 선물로 주는 게 왜 잘못된 거야?” 답변 “선물의 본질은 정성을 담은 마음이야. 돈을 선물로 주면 선물의 가치가 사라지게 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독자라면 익숙한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바로 마이클 샌델이 내놓은 것임을 알 것이다. 샌델은 현대 사회의 골치 아픈 도덕 문제를 무릎을 치게 만들 정도로 쉽게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핏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대답들은 샌델의 철학적 방법론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다. 몇 가지 간단한 지적만으로도 샌델의 해답은 무너진다. 어떤 욕망이 탐욕인지 아닌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선물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어떤 행위가 본질로부터 이탈했다면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처벌해야 하는가? 질문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가 잘못인 이유는 뭘까?” 답변 “실패에 포상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성공에 포상하길 원해.” 샌델은 포상의 본질은 성공에 대한 것인데, 구제 금융을 받은 금융 회사는 “실패를 포상했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났으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샌델 식으로 말하자면,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에 대한 구제 금융 자체도 악덕이 될 수 있다. “실패한” 회사에 돈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산 도미노로 경제가 붕괴할 위험이 생기고 궁극적으로 모든 납세자들의 삶이 훨씬 힘들어지더라도 구제 금융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반대로, 금융 투기를 일삼아 성공 가도를 달리는 금융 회사의 보너스 파티는 문제가 없는가? “실패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미덕이 보편적인 원칙이 될 수 있다면, 실업자에게 수당을 지원하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지 않는가? 실업자는 노동시장에서 “실패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샌델의 해법은 건실한 정치철학적 논증이라기보다는 대중의 분노에 ‘미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샌델이 도덕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사안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2. 본질을 만족시키면 미덕, 본질을 벗어나면 악덕이고 타락이다. 즉, 샌델의 이야기에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론이 이미 정해져있는 노골적인 순환 논증의 형태를 띤다. 정해진 결론이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렇다면 본질은 어떻게 파악할까? 샌델의 철학에서 본질이란 대개 (샌델 자신의)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특성들일뿐이다. 그것이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되면, 샌델은 공동체 구성원의 다수가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한다(“우리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존재이다”). 만약 두 번째 방식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비판을 받으면 다시 첫 번째 방식, 미덕과 본질을 분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으로 연구한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샌델이 철학하는 방법이다. 샌델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봉합해 버린다. 봉합이란 문제의 심층적인 전제를 정합성 있게 해명하지 않고, 떠오르는 답을 그럴듯하게 덧붙이는 태도를 뜻한다. 문제를 결론과 수사로 꿰매어서 핵심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다양한 문제 사이에서 일관성 있게 사고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샌델은 중요한 정치철학적 문제를 두고 직관과 감성을 근거로 들어 결론을 내리면서 미덕, 타락, 비하 같은 문학적 수사를 붙여 정당화한다. 정치철학은 시민들에게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 해결의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숨겨진 심층적인 전제를 밝히고, 시민들이 문제를 둘러싼 원칙과 근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마이클 샌델의 철학은 오히려 문제를 흐릿하게 만들고 이성적 탐구를 방해한다. 샌델은 “전차의 딜레마”를 해결했을까? “철로를 이탈한 전차의 사례”는 정치철학의 대표적인 딜레마이다. 샌델은 이 사례를 통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딜레마를 해결했을까? 전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이대로는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다섯 명을 덮치고 만다. 첫 번째 상황. 전차의 경로를 비상 철로로 바꾸면 철로 위에 있는 행인 한 명이 죽는다. 당신은 선로를 변경하겠는가? 두 번째 상황. 당신은 다리 위에서 전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당신 옆에는 덩치 큰 행인이 서 있다. 행인을 밀어서 기차에 부딪히게 만들면 인부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당신은 행인을 밀어 인부 다섯 명을 구하겠는가? 사람들에게 두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답하고, 두 번째 상황에서는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답한다. 샌델은 여기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직접적인 해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행인이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기를 망설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행인을 밀거나 밀지 않을 권리가 없다. 자신의 몸을 던져 전차를 멈추고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할 것인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행인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전차의 딜레마는 단순히 흥미로운 도덕적 딜레마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하는 사례이다. 즉 스스로가 목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자기 결정권, 이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이 외면하는 것이며 현대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핵심 가치이다. 이것에 반해, 전차의 딜레마에 있어 숨겨진 샌델의 해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타인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가 규정한 훌륭한 미덕이며, 개인은 공동체적 자아의 일부분이므로 그 행인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행인은 악덕을 저지른 것이고, 공동체에 의해 비난받아야 한다. 샌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본질 분석에서 최고로 치는 미덕은 단연 “공화국 시민들의 미덕을 고양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공화국 시민으로서 가져야 하는 미덕을 타락시키면 잘못된 것, 고양하면 옳은 것이다. 특정한 근거가 다른 근거들과 충돌할 때는 별다른 논증 과정 없이 거의 언제나 시민적 덕성을 강화하는 일이 우선된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피터 스타인버거는 “샌델은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보다는 주장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샌델의 정의는 위험하다 샌델은 정의에 관한 세계적인 학자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 본 독자들은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흥미진진한 딜레마, 공동체, 좋은 삶, 미덕과 악덕 같은 단어만 나타날 뿐 정의에 관한 체계적인 원칙은 찾을 수 없다. 실제로 샌델은 정의를 주장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국가가 미덕을 진작시켜야 하고, 정의의 원칙과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정치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임무에 방해가 된다고 본다. 그 결과 마이클 샌델에게는 정의론이라 할 만한 체계적인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가 좋은 삶을 규정하고 국민들이 그에 따라 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국가 완전주의라고 한다. 국가 완전주의의 핵심 명제는 “좋은 삶이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샌델은 공동체(국가)에 실체적인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 샌델은 정의론의 본령인 자유주의가 “정의와 권리의 영역”에만 논의를 한정하고 실질적인 정치의 영역에서 후퇴하여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무릇 정치철학이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공동체(국가)가 정치를 통해 그러한 결론(좋은 삶)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개인의 이상과 공동체가 규정한 이상이 충돌하면 공동체가 우선한다. 개인의 이상은 공동체(현실적으로는 정부와 사법부)에 의해 금지되고 처벌된다. 샌델의 미덕 이론은 개인을 미덕을 담는 그릇으로 여긴다. 공동체가 결정한 미덕을 최대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것이다. 샌델이 그리는 사회,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 결정에 따라야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그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삶에 진정성 있는 책임을 느낄 수 없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은 공동의 결정에 따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국가의 제재를 받기 때문에 그의 삶은 등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이댄 채로 사는 것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자유지상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이미 이런 삶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 “노예의 우화”로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삶에는 진정한 후회, 뿌듯함, 만족, 회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검토한 것에 따를 수 있는 권리가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샌델이 왜곡한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를 복원하다 샌델은 자신은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소연하며, 때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샌델은 정치의 본질이 국가가 이상적인 좋은 삶을 규정하고 시민들이 그 이상에 맞춰 살게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이미 자유주의의 핵심 신조를 부인한 것이다. 샌델이 생각하는 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주의이자 가치 상대주의이다. 현실의 인간이 진실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관계나 가치를 자유주의가 외면하고 있으며, 개인의 신념에 간섭하지 않고 무엇이 좋음이고 무엇이 나쁨인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샌델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좋은 삶에 대한 객관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다만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신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가능성을 인정하며,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때 오히려 자신의 삶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며 좋은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틀릴 수 있고 때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전제이다. 그런 과정에서 누구나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본질적인 가치를 규정해 주고 그에 따라 우리 삶을 개선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대원칙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자유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어떤 행동을 강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확신을 드러낸다. 개인이 스스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삶의 가치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 신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샌델에게 만족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진짜 정의론을 찾는 나침반이 될 것이며, 시민의 지위를 공격하려는 모든 공격에 맞서기 위한 방패일 뿐만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