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도 ‘찾아보기’를 생략한 이유를 해명할 때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디지털화했을 때, ‘코끼리’를 검색해서 그 낱말을 포함하는 사료를 모두 얻을 수 있다고 좋아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얻은 단편적 사료만 가지고 역사적 맥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까? 검색하기 쉬운 자료에 쉽게 접근하는 장점을 높이 사지만, 거기에만 의존해서는 전후 사정을 절대 알 수 없다. 종이책의 ‘찾아보기’는 디지털화하기 전의 검색엔진이다. 검색어 위주로 내용을 찾아내는 장점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독자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불친절한 길을 택했다. --- p.7
국민공회는 1793년 6월 하순에 헌법을 제정하고 나서 7월 초부터 실시한 전국의 기초의회의 지지투표를 거쳐 8월 10일에 반포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파리에서 7월 초에 투표를 실시했고, 브르타뉴 지방의 피니스테르 도의 샤톨랭Chateaulin에서는 이듬해에 가서야 투표를 실시했다. 전국의 유권자 700만 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고, 찬성이 170만여 명에 반대가 1만 2,000명이었으니, 오늘날의 셈법으로는 민주주의 실험의 첫 단계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셈법만 중요하지 않다. 다수가 반드시 정의롭다고 보기 어렵고, 자발적인 동의와 참여의 결과여야 도덕적으로 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유신헌법, 체육관의 대통령 선거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다. --- p.17
[9월] 17일에 국민공회는 반혁명혐의자법을 통과시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무나 특정인에게 혐의를 씌우면 그는 위험한 처지에 떨어진다. 유죄추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1792년 9월 초의 학살사건에서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혁명기 국내외의 전시 상황에서 ‘혐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벌을 수반할 수 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 p.38
이처럼 한시적인 혁명정부는 국내 모든 헌법기관에 위원들을 파견하면서 민중협회들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방데?툴롱의 적과 내통자들을 완전히 처벌하지 못했음에도 전국의 연방주의자들과 특히 리옹과 방데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신을 회복한 국민공회가 이론의 여지없이 한마음으로 혁명을 수행하고 혁명의 수출까지 내다보면서 만든 법이었다. 이제부터 ‘나, 아니면 적’이 더욱 분명해지고, 줄을 조금만 잘못 서도 목숨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이 더욱 심해지는 시기를 맞이했다. --- p.123~124
사형을 언도하자, 브리소는 머리를 푹 숙이면서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장소네는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면서 법 적용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고 나섰지만, 다른 사람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부알로는 놀라서 모자를 던지더니 “나는 무죄다!”라고 외치고 방청객을 향해 격렬히 간청했다. 피고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인민들은 속았소! 우리는 결백합니다”라고 외쳤지만, 방청객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군사경찰들이 그들을 억지로 앉혔다. 발라제는 품에서 단도를 뽑아 가슴에 꽂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실르리는 목발을 떨어뜨리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양손을 비비더니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이다”라고 외쳤다. --- p.151
감옥과 수감자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깨끗해졌다는 뜻일까? 무죄추정이 아니라 유죄추정의 원칙을 인정하는 반혁명혐의자법과 사회를 더욱 일사불란하게 압박하는 혁명정부가 존속하는 동안 감옥 안팎이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 나쁜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시절에나 공동체의 이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국가 위기 상황에서 돈과 지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변명거리를 찾아주기는 어렵다. --- p.213~214
혁명정부는 프레리알법을 시행하면서 단두대를 부지런히 가동했다. (중략) 이처럼 수치를 비교해보면 프레리알법과 공포정의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민주화한 세계에 사는 우리는 사형제의 문제점을 생각해야 한다. 당시에 과부 마이에la veuve Maillet는 다른 과부 마이에la veuve Maille 대신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늦게 잘못을 깨달은 푸키에 탱빌은 후자를 잡아다 처형했다. 전자의 억울한 죽음은 드문 사례라서 사형제의 정당성을 흔들 수 없는 것인가? 더욱이 반혁명혐의자 명단에 올라 처형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던가?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권력을 잡은 수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사형제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 제도이므로 폐지하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 p.310~311
로베스피에르는 계속해서 연단에 오르려고 노력했지만 저지당했다. 전날에 이어 더욱 드센 저항을 받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열 달 전만 해도 앙리오가 대포를 동원하고 국민공회를 포위해서 몽타뉴파의 주도권을 확보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몽타뉴파가 갈가리 찢어졌고, 그 속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적들이 생겼다. 로베스피에르가 적을 만들었다. 임지에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남용한 의원들을 소환한 뒤, 이들은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으니, 결국은 로베스피에르가 만들어낸 적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언로가 막히자 의장석으로 뛰어가면서 외쳤다. 튀리오가 방울을 울려 로베스피에르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그때부터 울부짖듯이 발언권을 요구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방울소리가 웅변가의 입을 막았다. 의원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처절할 정도로 비장했다. “마지막 한 번만 발언권을 주시오, 살인자들의 의장이여.” 욕설을 듣고서도 튀리오는 담담히 방울을 흔들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숨을 헐떡거리며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면서 오브의 가르니에Antoine-Marie-Charles Garnier가 외쳤다. “불쌍한 사람, 당통의 피가 그대를 질식시켰다.” 로베스피에르가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렬히 받아쳤다. “결국 당통의 복수를 하겠다는 말인가? 비겁한 사람들! 그때 그를 보호해주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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