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요, 마노가 당신을 찾을 거예요.” 당시 중동 여행객 사이에서 유명하게 떠돌던 말이다. … 과연 소문대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이집트인이 다가왔다. … 마노는 냉장고 문을 열더니 무언가 꺼내어 이게 뭐냐고 물었다. 한국인이 놓고 간 거라는데, 가만히 보니 멸치조림이었다. “이거 물고기야.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건데.” “정말? 제발 이것 좀 가져가줘. 나 이거 너무 싫다고.” 말을 주고받다 조용해서 돌아보니 어느 새 그가 사라졌다. 마노는 바닥에 천을 깔아놓고 그 위에서 절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오후기도 시간이 된 것이다. 그들은 기도할 때 누가 와도 절대 곁눈질하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04. 4대 천왕을 찾아서(이집트 룩소르)」중에서
이스라엘의 첫 관문 타바. 찌릿찌릿, 긴장감이 밀려온다. 타바항 국경은 여군들이 지킨다.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군 복무 중이다. 남성은 3년, 여성은 2년 복무하는데 여성은 방위군 같은 역할을 한단다. 여군들은 가방의 내 소지품을 꺼내 꼼꼼히 검사하더니 “쏘리”를 연발하고는 꼼꼼히 물건들을 넣어주었다. 다시 바짝 긴장. … 이집트, 요르단, 터키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동 국가에선 여권에 이스라엘 스탬프가 찍힌 사람의 입국을 거부한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스라엘 다음에 시리아행을 택하므로 별지에 스탬프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나도 흰 종이에 스탬프를 받았다. ---「07. 다마스쿠스 게이트 조심하랬잖아(이스라엘 예루살렘)
‘한국인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니 얼굴이 시뻘게지며 다리를 떤다. 30대 중반인 그는 일본인 엄마와 이누이트족(에스키모)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어릴 때는 캐나다 영토인 이누이트 마을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했다. … 이누이트어를 사용하던 그에겐 영어가 외국어였다. 그런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눈을 꼭 감고 이를 갈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다리만이 아니라 온몸을 떨었다. 이 친구, 예사롭지 않은데. ---「13. 맥심 없이 못 살아(요르단 암만 & 베다니)」중에서
엠의 가족과 둘러앉아 음식을 나눈 후엔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버지는 위층으로 올라가시고, 막내 동생은 어디론가 자기 일을 보러 갔다. TV를 보던 엠의 어머니가 스르르 잠드시자 엠도, 그의 여동생도, 나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대륙 동쪽 끝의 우리나라 그 반대편 서쪽 끝의 이 나라 모로코, 그중에서도 사하라의 낯선 가족들 틈에서 낮잠을 자게 됐다. 단검 걱정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베르베르인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좋으면 웃고, 그렇지 않으면 슬픈 눈을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고, 가족끼리 아옹다옹 부비며 살았다. 낮 3시의 점심으론 베르베르 전통음식인 따진이 차려졌다. 고기를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야채, 토마토, 병아리콩, 올리브를 쌓은 다음 향신료를 첨가하여 기본 소스를 두른다. 또 그 위에 당근, 호박, 가지, 감자 등 통 야채를 쌓아 1시간 정도 약불에 익히면 완성이다. 사막 음식답게 물은 넣지 않고 야채에서 우러난 수분으로 익힌다. ---「26.사하라의 이방인(모로코 켈라마구나)」중에서
그 밤, 모래 바닥에 담요를 깔고 밤하늘에 가득한 별 아래 잠들었다. 내 가슴 위로 마구 쏟아지는 사막의 별빛을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며 앞으로 생길 것만 같은 좋은 일들이 떠올랐다. 집에 있는 가족들 생각도 났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함께하면 좋겠다 싶었다. 매번 이런저런 핑계로 나 혼자 훌쩍 떠나왔는데. 그날엔 감상에 젖어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다음 여행 때도 이렇게 혼자일 것을 나는 안다. 이튿날 아침, 낙타몰이꾼이 요란스레 깨우더니 일출 구경을 가자고 했다. … 고요하고 상쾌한 사막의 아침. 그간 사막이 좋다며 떠나지 않는 유목민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평생 이 아름다운 모래언덕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사막과 사랑에 빠졌다. ---「28. 바람과 모래와 별 속에 친친(모로코 사하라)」중에서
화려한 옛 영광이 숨 쉬는 도시답게 시내 건물들이 하나같이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그중 한 건물에 요리강습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흥미가 생겨 주변에 물으니 당사자를 불러주겠단다. … 도착한 곳은 작은 가정집. 오토바이 사나이의 아내, 그러니까 오늘의 요리 선생님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맑게 웃었다. 평소엔 근처 피부관리 가게에서 일하고, 부업으로 요리교실을 한다고 했다. … 좁은 부엌에서 아내는 자파티 반죽을 선보였다. 보리, 렌틸콩, 녹두 간 것을 뭉쳐 반죽한다. 이런 난 종류의 빵을 아랍권에서는 보통 가게에서 사다먹는다. 그런데 인도는 집에서 직접 구워먹는단다. 인도 여자들은 자파티 굽다가 일생을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34. 쓰레기산 너머의 요리 선생님(인도 자이살메르)」중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뭐였어요?” 언젠가 한 구호단체에서 길거리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전쟁이 나면 무엇부터 챙길 것인가에 스티커를 붙여보라고 했다. ‘달러, 보석, 음식, 생필품,’ 보기가 이랬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에 가장 많은 스티커를 붙였다. 내 선택은 ‘달러’였다. 전쟁통에도 달러는 통용될 테니 그걸로 음식과 생필품을 사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생각했다. “여자.” 그의 답은 이랬다. 참혹한 전쟁 속에 그의 영혼도 삭막해졌다. 외롭고 지치고 닳은 몸과 영혼을 위로해줄 존재가 가장 절실했단다. 이 말에 가슴 아프면서도 섬뜩함이 몰려왔다. ---「48. 레바논의 시리아인(레바논 베이루트)」중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듯 일제히 한곳을 향해 걸었다. 프놈바켕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일몰을 감상하려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 저 멀리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톤레삽이 보였다. 수상가옥이 자리한 호수에는 관광객을 태운 보트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 생수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바로한 그 순간,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는 페트병을 가득 담은 자루를 진 채 나를 기다렸다. 먹던 물을 얼른 비우고, 나는 그 빈 페트병을 아이의 자루에 넣어주었다. 이거 모으면 얼마나 될까? 신들이 노니는 이곳, 저 아이에게도 신이 노닐다 가시길. 쏙 써바이.
---「56. 사원 그늘에 앉아서(캄보디아 씨엠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