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스물은 혹독한 사회생활의 시작이었고, 다른 누군가의 스물은 초호화 캠퍼스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 갇혀 있던 가비에게 진주의 인스타그램 속 일상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형형색색 스톤이 손끝에서 반짝이는 #네일 사진. #압구정 #갤러리아 에서 #샤넬 #디올 #가방 #쇼핑 사진. #벤츠 모는 남자와 #데이트 사진. #가로수길 #브런치 먹고 #청담동 #다이닝 #비스트로 에서 즐기는 #캐주얼와인 사진. #호텔 #수영장 에서 #샴페인 마시며 환호하는 #비키니 #파티 사진. #비즈니스석 타고 떠난 #해외여행 사진. 수천 장에 가까운 진주의 사진을 훑어보던 가비의 눈동자가 환상에 취해 점점 커져 갔다. 찬란한 해시태그들이 뿜어져 나와 뇌리에 박혔다. 컴컴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조가비의 세상이 유진주가 올린 총천연색 사진들로 오색찬란해진 순간이었다. --- pp.11-12
모두가 갖기를 바라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그래서 더더욱 탐이 나는 것. 그것을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저걸 가지지 못한 타인에게 부러움을 사고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 (중략) 비싸면 비쌀수록, 가져야 할 이유가 더 강해졌다. 영지의 환영, 높은 페디큐어 의자에 앉아 가비의 합성수지 가방을 내려다보던 그 눈빛. “평소에 엄청 소박하신가 봐요?” 가비의 옷, 신발, 액세서리 등을 차례대로 훑던 그 기분 나쁜 시선으로부터 저 가방이 불쌍한 가비를 지켜 주리라. --- pp.69-70
양재천 풍경 너머로 밤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이 솟은 고층 주상 복합 건물들이 보였다. 유리로 지은 성처럼 불이 환하게 들어온 수십억짜리 집들 아래 가비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향기롭던 훈의 꿈이 참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가비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보다 인위적이어도 고급스러운 조말론 향이 더 좋았다. 훈이랑 난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까. 둘이 아무리 벌어도 한가롭게 양재천 산책하는 저 가족들처럼은 못 되겠지. 수정 언니나 진주 언니처럼 타워팰리스에 사는 날이 오진 않을 거야. 그치? 발밑으로 느릿하게 개미들이 지나갔다. --- p.103
손에 쥐지 못하는 걸 잡고 싶어 하는 건 남자든 여자든 비슷할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나 탐내는 것이라면 더더욱. 가비는 두근거렸다. 찰칵! 샴페인 잔을 든 진주가 고귀한 미소를 지으며 가비의 팔을 휘감았다. 찰칵! 찰칵! 찰칵! 그녀가 선물한 반클리프 팔찌가 빛났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래, 진주 언니는 친절해.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샴페인에 입술을 적셨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술이 달콤하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언니 방금 웃은 거 맞죠? 찰칵! 찰칵! 저 보고요. 찰칵! 그죠?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진주에게 뿌려지는 로즈골드 같은 착각들. 신기루처럼 드리운 환상. 온도 차가 있는 어둠 속엔, 잘못된 빛이 반사한 오로라가 있는 법이니까. --- pp.124-125
가비가 와인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서초동 세컨드 하우스에서 찍은 와인 잔 사진은 해시태그만 봐도 누구나 ‘좋아요’를 누를 만큼 근사한 사진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데서 열리는 난해한 예술전의 필름 사진 같았다. 하늘에 붕 떠 있는 한나의 강아지 사진이 그러했듯. 가비가 술을 쭉 들이켰다. 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잖아? 그럼 적어도 나쁘게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 몸이 나른해졌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괴로움이 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