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부터 변함없는 일상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세트도 더이상 날 쌀쌀하게 대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아세트가 계속 날 차갑게 대할까봐 걱정했으니까. 내가 외출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사흘 후, 유일한 여성 장로였던 클로로가 죽음을 맞이했다. 크레졸이 사라지고 나서 최초의 사망자였다. 난 아세트와 함께 클로로 장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은 에쿠아트라는 마을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그때 난 처음으로 다른 엘프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엘프들도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는데 옷이 거의 대부분 똑같았다. 그리고 에쿠아트 가까이에 엘프들의 집이 많이 보였다. 집 구조 역시 아세트의 집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너무나 획일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클로로 장로의 시신은 보통 어른 크기만한 크기의 비교적 얇은 나무판 위에 올려졌고 네 명의 청년 엘프들이 그 나무판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줄을 잡고는 나무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에쿠아트 근처에 있는, 유난히 나무가 울창한 낮은 언덕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많은 엘프들이 '솔베이트'라 불리는 언덕 바로 앞까지 따라갔다. 분위기는 굉장히 조용하고 엄숙했다. 아무도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대부분의 엘프들은 무표정하게 따르고 있었지만 클로로 장로와 평소 친분이 있던 몇몇엘프들은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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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세트가 놀라 뭐라고 외친 것 같았지만 난 들을 수 없었다. 눈을 한번도 깜박이지 않아서 눈물이 흐른 건지, 아니면 기뻐서 눈물이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분명한 세계를 보며 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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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작정 숲을 헤치고 나갔다. 숲에서 길찾는 방법 같은 걸 내가 알 리가 없으니까.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이 멈춰있었다. 뭐냐 이건? 시계가 죽었나? 난 시계를 벗어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계속 숲속을 헤맸다.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난 안경까지 벗어 교복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안경을 벗으니까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시력 검사대.... 맞나? 어쨌거나 시력 검사할 때 그 검사대 위에 적힌 숫자를 안경벗고 보면 하나도 안보인다. 가장 큰 숫자인 4도. 두 눈을 뜨고 아무리 인상써도 5미터 이상되는 거리에서는 흐릿할 뿐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숲속을 헤매며 내 정신도 흐릿해져 갔다. 우....이건 모두 내 잘못이지. 뭐, 죽을 각오를 하고 그 공간 속에 발을 들여놓은 거니까..... 하지만.... 죽일려면 한방에 죽여줘!!! 얼마나 숲속을 헤맸는지 모르겠다. 난 시간 개념이 희박해서..... 10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거의 비몽사몽간을 헤매다가 난 어떤 공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몇개의 나무집들이 보였다. 집...? 그럼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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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암흑 통로를 쳐다보았다. 머리 속에서 들어가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들어가기가 매우 꺼림칙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이대로 저 암흑 통로를 지나쳐간다해도 멈춰버린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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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근시다. 근시란 쉽게 말해서 가까운 건 보이고, 먼 건 잘 안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 반대는 원시로 먼 게 보이고 가까운 게 안 보인다. 근시가 되는 이유는 수정체가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난 텔레비전을 하도 가까이 봐서 수정체가 두꺼워진 채로 굳어버린 상태다. 수정체란 우리가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초점을 조절하는 기관으로, 지금 난 그 수정체를 운동시킬 작정이다. 그래서 근시를 근원적으로 치료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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