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북조선을 방문하여 60여 년 만에 김일성 주석과 상봉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아내와 함께 오마하의 지식인층들이 자주 모이는 식당을 들렀는데 안면이 있는 교포들이 나를 둘러싸고 북조선에 다녀온 소감을 물어왔다. 때마침 우리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슬며시 우리 자리에 끼어들었다. “이 분이 최근에 북조선을 다녀오신 손원태 선생님이세요”라고 어느 교포분이 나를 소개하자 그 젊은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남한에서 온 대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길림 시절에 맺어진 김일성 주석과의 우정과 만주에서 벌였던 그의 전설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대해 그리고 6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뛰어넘어 팔십 고령에 다시 이어진 우리의 우정에 대해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해주었다. 젊은이들은 깜짝 놀라면서 “그래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는데요!”라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미심쩍어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사를 반 토막밖에, 그것도 태반은 왜곡된 역사를 배우며 자란 젊은이들이었다. 어느 것이 참 역사이고 어느 것이 거짓 역사인지,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매국인지조차 헤아려보지 못하는 세대가 조국 땅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마도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머리말」중에서
1927년 2월이라고 기억된다. 도산의 시국대강연은 길림성 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열렸다. … 조선 수탈의 첨병이었던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한 의열단 나석주 의사의 추도식을 겸한 이날의 행사에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거두들을 비롯하여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자들과 유지들, 길림에 있던 조선인 상공업자들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집결하여 강연장은 청중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지금 기억하건대 아버지는 당시 길림을 떠나 액목현에 가계셨던 관계로 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도산 선생의 연설이 시작되자 청중은 숨을 죽이고 경청하였다. 선생은 조선 민족의 장래 문제를 놓고 강연하였는데 우리나라 민족주의 운동의 곡절 많고 쓰라린 실패의 역사를 개괄하고 나서, 우리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찾고 어떤 방략을 세워나가야 하겠는가 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였다.
…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웅성웅성하는 소음이 들렸다. 청중들은 못마땅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시 어떤 중학생이 연단으로 나가 선생의 연설 탁자 위에 종이쪽지 같은 것을 놓고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도산 선생은 그것을 펼쳐보더니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고, 청중도 무슨 일인가 하여 숨을 죽였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인데 그 쪽지는 김성주 형이 도산 선생에게 제출한 의견서였다고 한다. 뒤쪽에 앉았던 일부 청년 학생들에게는 선생의 연설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중에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은 외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민족 자체의 실력을 배양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말하자면 당장에 힘이 없으니 장기적으로 힘을 길러 일제와 맞서보자는 것이다. 아버지도 점차 이런 주장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액목현에서 벌여놓은 일은 모두 이런 실력배양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노선은 당시 청년세대들의 정세 인식과는 맞지 않았다.
후에 우리가 소년회에서 독립운동방략을 놓고 웅변모임을 할 때 이준의 방법이냐, 안중근의 방법이냐, 아니면 안창호의 실력배양론이냐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김성주 회장은 “이준의 방법도 아니고 안중근의 방법도 아니며, 실력배양론도 옳지 않다.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한다고 하는데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한가? 소학교 훈도들까지 칼을 차고 일본말 교육을 시키는데 교육은 어떻게 진흥시키고 수력발전소는 어디에다 건설한단 말인가!
또한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임을 역사가 증명했고, 이준 선생이 피로써 교훈을 남겼는데도 여전히 열강의 원조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며 열변을 토하였다. 성주 형은 도산 선생의 강연 때에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서면질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질의서 내용을 청중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에 대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제기된 질문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시간적으로도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바로 그 몇 분 후에 경찰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김성주를 처음 만나다」중에서
그 무렵에 나는 상해 [대공보]에서 김성주 형의 길림 시절 이후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신문 한 면에 걸쳐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김일성 빨치산의 항일운동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 형은 끝내 그길로 갔구나!’ 그날 밤 나는 만주의 눈보라 치는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는 그이를 생각하며 푹신한 침대가 편치 않아 뜬눈으로 지새웠다. 길림의 소년 혁명가 김성주는 자신의 길,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의 험로를 걸었다. 그것은 길림 시절에 이미 결정된 그의 삶의 지향점이었고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길림 시절 김성주의 생애와 활동, 그가 지향했던 삶과 실천에 대해 모든 것을 쓸 수는 없다. 물론 소년회 모임에서 자주 만나긴 했어도 그는 소년회의 회장일 뿐 아니라 유길학우회도 주관했고, 반제청년동맹과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등 많은 비밀사업을 하였기에 활동의 폭과 심도가 대단히 넓고 깊었을 것이고,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그이의 그런 활동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시간과 전설의 시대」중에서
만주벌판을 신출귀몰 주름잡으며 곳곳에서 왜놈들의 군대와 경찰들을 쳐부수던 유명한 빨치산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상해 [대공보]의 기사를 보기 한참 전이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자주 신문에도 실렸고, 사람들의 화제에도 많이 올랐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는 그 김일성 장군이 길림의 김성주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이는 백범 김구 선생과 이름이 같았던 김구(백송) 씨였다. 그분은 아버지와 동향인 강서 사람으로 상해임정에 함께 관여했으며 나중엔 길림에서 독립운동도 함께 하셨다. 김구 선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우리를 각별히 돌봐주곤 하셨다. 우리가 베이징에서 살 때였다. 하루는 그분이 집에 오셨는데 나에게 귓속말로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길림서 너희들 소년회 회장하던 김성주 그 사람이 만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김일성 장군이 그 사람이야. 손 목사님이 사람을 빗보지 않으셨어. 큰일 할 대목감이라 하시더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주 형이 기어코 게릴라전을 시작했구나! 독립군이 쇠잔해가는 걸 그리도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님이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반가워하시랴!’ 싶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째서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형인 신국권 씨와의 우연찮은 대화 속에서 김일성 장군이 틀림없는 길림의 김성주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추억의 시간과 전설의 시대」중에서
다음으로는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다. 그들은 김일성 주석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배경에서 찍은 사진을 놓고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도 역시 그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길림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이끌 때의 사진도 있었고 해방 후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무장투쟁을 할 때는 얼마나 모진 고생을 겪었는지 본래의 모습을 전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서로 다른 사진 속에서도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성주 형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나는 가슴이 아파서 울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자고, 망국노가 된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하자고 그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던 그이였다. 그래서 그렇게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풍상에 시달렸던 이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일제에 부역하며 오로지 자기 일신의 안락과 영달만을 추구하던 자들이 감히 헐뜯으려 달려들다니!
… 하느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어째서 이런 악인들이 세상을 활보하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의사의 직분에 충실할 뿐 남의 말이나 정치 같은 데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었다. 기억도 생생한 김일성 주석과의 어린 시절 인연이 깊은 나로서는 이 문제가 그 어떤 학술상의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 양심과 관련되는 하나의 도덕적인 문제인 것이다.
---「추억의 시간과 전설의 시대」중에서
나는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렇다 하게 한 일도 없는 내가 이렇게 좋은 집을 쓰고 살자니 송구스럽기 그지없다고 말하였다. 주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혼자소리처럼 말하였다. “나야 손 목사님 은혜가 크지. 그런데 나는 목사님을 위해 무엇 하나 해드린 게 없소.”
그 말이 어찌나 절절하게 울렸는지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고 보면 주석이 나에게 쏟아붓는 사랑은 그저 옛 벗에 대한 우애만이 아니었다. 언제인가 주석은 우리 아버지의 급작스런 병사에 대한 의문을 말하다가 그렇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비명에 간 분들이 많다며, 안창호 선생도 일제가 감옥에서 밥에 유리 가루를 섞어 먹여 죽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애국지사들의 친지나 혈육을 만나게 되면 갑절로 마음이 더 쓰인다고 하면서 그들을 잘 돌봐주는 것이 먼저 간 독립지사들에 대한 자신의 예의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공화국에서는 안창호 선생의 누이동생, 양세봉 선생의 자제, 이준 선생의 후손들이 다 주석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우대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주석의 인정이 얼마나 깊고 넓은가? 지구상의 모든 강줄기들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에나 비길 수 있으리라.
---「김일성 주석을 다시 만나다」중에서
이날도 나는 주석에게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은 교회 자체가 부패한 것 때문이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그이는 수긍하였다. “그거 옳소. 그전에 우리 어머니가 일요일이면 꼭 예배 보러 갔었소. 나도 함께 갔지. 내가 어머니에게 예배당엔 왜 가느냐고 물었더니 쉬러 간다고 하시는 것이었소. 사실 따라가 보면 어머니는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계속 자다가 왔는데 ‘아멘’ 소리에 깨어나곤 하였소. 그러고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가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요, 자기 양심을 다스리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믿겠으면 조선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오. 마음에 조선의 하느님을 간직하고 자기 민족에게 욕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좋은 게지. 원태 어떻소. 천당을 믿소? 누구래 가봤대?”
우리는 즐겁게 웃었다. 시간이 퍽이나 흘렀다. 오찬도 끝났으니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김 주석은 헤어지기에 앞서 이런 뜻깊은 말을 하였다. “나는 손원태와 같은 친구를 늘그막에 다시 만난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오. 더 늙으면 오시오. 조국에 묻혀야지. 비행기를 타기 힘들면 오시오. 손 선생이 오면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젊었을 때 이야기를 합시다. 낚시질도 하고….” 그러고는 “이제 갔다가 8월에 와야지. 와서 팔갑 생일 쇠시오. 내가 잘 차려주지… 자식들도 데리고 오고 사돈이랑 친척들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하였다.
나는 주석과 헤어질 때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고 오래 사시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내 걱정은 마오, 나도 오래 살 궁리를 하오.” “제가 보건대 주석님은 100살까지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100살까지 살면 그거야 기적이지.” 주석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와 작별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김 주석과의 마지막 만남이며 그 말이 그이와 나눈 마지막 말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1994년 5월 26일 아침 9시 30분부터 오후 1시 25분까지의 4시간은 김일성 주석이 우제 손원태를 위해 마련한 마지막 자리였다.
---「김일성 주석을 다시 만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