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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푸른사상 시선-12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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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18g | 128*205*9mm
ISBN13 9791130816470
ISBN10 1130816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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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나의 적을 향해 가고 있다
적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도 나의 적을 위해 가고 있다
적을 위해 사는 것 같다
나는 너무 많은 적을 두고 살았다
적은 적을 낳고 또 적은 적을 낳고
마침내 적은 나를 낳았다

적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남의 적을 갖다 내 적으로 만들었다
나의 적도 없고 남의 적도 없는 날
나는 내가 나의 적이 되었다
나는 나의 적이 되어 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적이 되어 나를 위해 살고 있었다
많은 적들이 나를 위해 있었다
많은 적들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오직 적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적들은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 적들을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많은 적들은 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적들이 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적들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비가 내리던 밤
나는 이제 단 하나의 적만 두고 다 갖다 버렸다
나는 많은 적들을 다 갖다 버렸다
나는 나도 다 갖다 버렸다
나는 이제 단 하나의 적을 향해 가고 있다
단 하나의 적을 위해 살고 있다
-나에게 남은 저 마지막 적은 누구인가
봄비 봄비 봄비
--- 「봄비」 중에서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소통도 아니고 광기도 아니다
신앙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환상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다
철학도 아니고 심리학도 아니다
낙관도 아니고 비관도 아니다
어울림도 아니고 엇갈림도 아니다
떠돎도 아니고 멈춤도 아니다

번민도 아니고 연민도 아니다
인식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다
영혼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다
명상도 아니고 묵상도 아니다
치욕도 아니고 치유도 아니다
김수영도 아니다 김종삼도 아니다
소월도 아니다 백석도 아니다

시인은 눈 한 번 마주친 독자도 없이 그저 제 발자국 지우며 살아간다
시인은 창문도 없는 독방에서 방금 쓴 시와 단 둘이 마주 앉아 있다
시인은 한밤중에 일어나 어제 하던 뜨개질을 이어서 다시 하고 있다
---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김수영을 다시 읽었다
김수영을 다시 읽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모든 사랑이 다 첫사랑이듯
김수영은 언제나 처음이다
김수영을 깊이 읽었다
김수영을 깊이 읽었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시인들은 시를 깊이 읽지 않는다

김수영이 사십여 년 지나 다시 내게 다가왔다
김수영도 모르고 나도 모를 일이다
해 질 녘 도봉산 김수영 시비에 다가가듯
내가 김수영한테 다가갔다
아니다 김수영이 다가왔다
아니다 내가 다가갔다
아니다 아니다 나도 모르겠다

내 안에 아직도 김수영이 남아 있는지……
내 안엔 김수영뿐이었다
나는 오직 김수영을 읽었고
나는 다시 김수영을 생각했다
다시 나는 김수영을 읽었고
다시 나는 김수영을 생각했다
그리고 김수영을 썼다

오오 빛나는 사월 한 달 내내
나는 김수영을 다시 만났다
김수영도 모르고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알고 김수영만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알고 김수영도 알고
오직 집사람만 모를 일이었다
아니다 나도 모르고 김수영도 모르고
집사람도 모를 일이었다
-그대 젊은 시인이여!
--- 「김수영 다시 읽기」 중에서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고 많은 술을 마셨다
등단하자마자 곧바로 작가회의에 가입했고
농성과 집회와 각종 모임도 빠지지 않았다
그 어떤 뒤풀이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김수영과 살았고 또 김종삼하고도 살았다
신경림과 살았고 또 김지하하고도 살았다
또 작가회의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던 많은 친구들과 살았다
시를 쓰며 살았고 또 시를 읽으며 살았다
단편소설을 읽고 베토벤을 들으며 살았다
창비 쪽에서 쭈욱 살았고 창비 쪽에서 컸다
그러나 친구들은 나를 창비 서자라고 한다
수락산 귀임봉과 무수골 원통사 길에서 살았다
그리고 나는 순간 순간 그리고 천천히
한국 정치와 살았고 한국 정치와 헤어졌다
한국 교육과 살았고 한국 교육과 헤어졌다

그러나 나는 천천히 그리고 순간 순간
너를 위해 살았고 또 너를 위해 헤어졌다
남의 시선을 위해 살았고 남의 시선과 헤어졌다
나는 남과 싸웠고 그만큼 나하고도 싸웠다
분노를 위해 살았고 분노를 위해 헤어졌다
슬픔을 위해 살았고 슬픔을 위해 헤어졌다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또 시를 썼다
시를 위해 시를 썼고 나를 위해 시를 썼다

이젠 아무것도 없이 시를 위해 시와 살아갈 수 있고
시는 시를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시는 바람의 절친도 구름의 내연녀도 아니고
어떤 권력이나 자본과 동맹도 연합 관계도 아니다
시는 또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시는 결코 아름다운 영혼도 황홀한 언어도 아니다
결국 헛살기 위해 굳이 헛살았다는 듯
--- 「나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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