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 말은 당신이 만족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당신이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마셨다면 이제 좀 살 만하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특히 더 큰 임재를 경험하는 것도 그와 같다.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당신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챌 것이고, 사람들에게 “제가 지금 하나님의 큰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건가요?” 하고 질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질문한다면 아직 그분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 p.47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고 느꼈다. 그 결과 나는 야심만만한 사람으로 자랐다. 야망으로 가득 차게 되자 나는 종종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뿐 아니라 실제 내 모습보다 나를 더 부풀려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도 마틴 로이드 존스도 아니고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흔한 살 나이에 웨스트민스터채플 담임목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자리에 내가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기회에 우리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캠벨 몰간과 수석 설교자 존 헨리 조윗, 그리고 내 멘토 마틴 로이드 존스의 뒤를 잇는 자리에서 섬기게 되었다. 사실 그곳에서 섬기는 25년 동안 나는 그 강단이 내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님의 강대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위대한 거인들의 뒤를 잇는 합당한 후계자가 되려면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가끔씩 그저 괜찮은 설교를 한 날에 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당신은 역시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님의 훌륭한 후계자”라고 칭찬해 주기라도 하면 내 마음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시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당시 나는 계속해서 애를 썼다. …(중략)…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스스로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자비롭게 권면하신다(롬 12:3). 그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지극히 겸손하게 만들며, 비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자신의 한계)을 더 빨리 받아들일수록 내면의 평안을 더 일찍 누릴 수 있다.
--- p.91~93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으라. 그것을 취하라. 투덜거리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 당신이 갖기 원했던 은사나 지위를 가진 사람을 시기하지도 말라.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기 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열망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주님, 사랑해요”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아니 심지어 “주님을 간절히 원합니다”와 같은 말을 반복해서 되뇐다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원하는지 보여 줄 수 있다. 그분의 뜻을 존귀하게 여기고 받듦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더 깊이 경험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 p.105~106
내가 무척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하나가 [영광스럽도다 참된 평화는]이다. 3절에 이런 가사가 있다. “맘의 기쁨이나 시련이라도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도다. 주를 의지하고 믿기만 하면 주의 뜻을 따라 살게 되리라.”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는 ‘시험, 시련 혹은 유혹’을 뜻한다. 이 단어들은 서로 혼용해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페이라스모스를 시험으로 해석할지 유혹으로 해석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 찬송가의 저자가 시련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한 것이다. 시험도 기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조율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떤 시험을 당하든지 기쁨으로 받으라고 권면한다. 결국 당신은 90세 된 어느 성인이 내게 말해 준 것과 같이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주님을 정말 오랫동안 섬겼는데, 이제는 도무지 축복과 시험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네.”
시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더 큰 기쁨을 얻으려면 애써 시험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건가 오해한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매일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옵고”(마 6:13; 원문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이다-옮긴이주)라는 기도가 있다.
--- p.185~186
만약 원수에게 복수하는 일이 당신에게 가장 좋다면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복수할 기회를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더 큰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수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그 일이 반드시 당신에게 유익이 될 때에만 그렇게 하신다. 당신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그분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으로부터 어떤 좋은 것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시 84:11).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분을 두 배나 더 깊이 경험하는 기쁨을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원수에게 보복해 주실 수도 있다. 그분은 정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면,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뜨거운 태양 아래 물과 같이 모두 다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하나님이 신원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 억울함을 풀 기회를 포기할 수도 있는가? 신원과 보복은 비슷하다. 하나님은 둘 다를 주관하는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이런 일들이다. 복수란 당신의 원수가 벌을 받는 것이고, 신원이란 당신이 뒤집어쓴 억울한 누명을 벗는 것이다. 그 둘 다 당신의 자부심 혹은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를 다 주관하신다.
--- p.220~221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탄이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마귀는 스스로 자격 있다 여기는 마음, 자기 연민, ‘자기 의’를 뒤에서 조장한다.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세 가지 ‘R’을 이해해야 한다. 인식하고(Recognize), 거부하고(Refuse), 맞서 싸우는 것(Resist)이다. 사탄을 인식하는 것을 배우라. 사람들이 당신의 앞길을 방해하거나 당신을 무너뜨리려 들 때, 그러한 반대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지 인식하라. 바로 악한 영들이다. 당신은 “혈과 육”(엡 6:12) 즉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계략에 무지한 자가 되지 말라(고후 2:11). 그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라. 악한 영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것에 맞서 싸우라. 그리하면 그들이 당신을 피해 달아날 것이다.
--- p.268~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