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Touch of s ice가 생각납니다. ‘양념의 감촉’이란 뜻인데, 어린 손자와 생이별하는 요리사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합니다. ‘미트볼을 만들 때, 계피를 넣어보렴. 누구나 커민을 넣지만, 그건 습관적인 맛을 내지. 그러나 계피를 넣으면 그 맛을 사람들이 기억하게 된단다’ 새로운 음식 또한 습성의 틀을 깨는 순간 나온다는 교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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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벼랑에 서서, 그 아픔을 ‘오직 독서’로 극복했을 뿐 아니라, ‘오직 독서’로 그 대안을 제시했던 다산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사실 마사여구로 젊음을 위무하고, 상투적 문구로 청춘의 앞날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시기에 내가 겪었던 패배감과 그 돌파방법을 고백함으로써,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 p.37
릴케가 노래하듯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갈구하는 자세로 시간의 주인이 되자. 가을은 사랑하기에 이미 늦은 계절이 아니다. 가을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발치에 더욱 맹렬히 매달리는 계절일 뿐이다
--- p.88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든 게 다 사라진 건 아닌 달’이라 부른다. 그건 십일월이나 노벰버November란 명칭보다 월등히 시적인 이름이다.
--- p.94
이별을 예감하기에 인간의 삶은 더 겸손해지고 절박하며 정겨운 것인지 모른다. 이별의 변형 중에 유기와 유폐, 유배와 망명이 있다. 마르시아 엘리아데M.Eliade 는 영웅의 절대조건으로 ‘버려진 아이들’ 유형을 꼽는다. 제우스, 모세, 오이디푸스는 물론 우리의 박혁거세, 김알지, 유리왕, 무학대사까지 영웅들은 한결같이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베드윈족이었던 마호메트는 종족의 전통에 따라 여섯 살까지 사막에 유기되었으며, 인디언의 성년식이 유기의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연적 요소로 양육된 자들이 바로 영웅이기 때문이다.
--- p.99
참 오랜만에 소래포구를 지난다. 익숙한 풍광이 사라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지난 이십여 년 사이 천지가 개벽한 느낌이다. 소금창고와 신도시 아파트의 어울리지 않는 공존, 그 때문에 갑자기 엉뚱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소금이 새라면 가금류家禽類에 해당하지 않을까. 바닷물을 새장에 가두듯, 몇 번이고 길들여 결국 바닷물의 푸르름이 다 빠진 흰 재, 그게 소금이니 말이다.
--- p.113
이국의 방언 하나를 배운 것처럼 새삼 나는 모레, 모레하고 혀끝으로 그 음가를 굴려본다. 모레란 말에선 코발트 빛깔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 속살은 기다림으로 버무려진 연분홍 색깔일 것만 같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여자 이름, 회사명, 상호... 어느 곳에 갖다 붙여도 손색이 없겠다고. 부족하긴커녕 가장 고상하고 빛나는 이름이 되겠다고. 이참에 나도 ‘모레’란 시를 써볼 참이다.
--- p.125
우연한 순간, 낯선 손님처럼 찾아오는 감각의 신비한 방문이 바로 영감이란 걸 우리는 본다. 이런 돌연한 반응을 베르크송은 생의 근원적 힘인 엘랑 비탈이라고 불렀으며, 버나드 쇼는 생명력The life force이라고 진단하였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움직인 엘랑 비탈은 신비감이었다. 그는 ‘신비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하다고 썼다. 2018년 3월 16일, 아인슈타인의 생일날 타계한 스티븐 호킹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호기심을 지니라’고 유언을 남겼다. 신비에 대한 탐미적 호기심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의 토대란 걸 강조한 셈이다.
--- p.130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 독창적 사고, 놀라운 심리묘사, 그리고 새로운 문장 말이다. 그는 선악이나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존재의 양면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의 선봉이 되었으며, 상대주의 사고 및 입체적 시선을 선도하였다.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도 그렇다. 그의 이런 독자성은 우울한 혁명의 시기, 사유의 진폭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간 치열성에서 연유한다. 우울증은 물론 치질과 방광염, 그리고 간질로 고생했으며, 지병인 천식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세계문학사에 남긴 족적은 실로 눈부시다.
--- p.166
예컨대, 흙을 물질 이미지로 바꿀 때, 점토는 사람이나 짐승, 나무 등 여러 가지 오브제를 빚어낼 수 있으며, 점토의 매끄러움이나 끈적거림을 통해 또 다른 몽상이 가능해진다. 물 또한 물질적 상상력으로 바뀔 때, 세월이나 역사의 의미는 물론 지혜나 유연함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불도 마찬가지다.
--- p.170
글쓰기 행위 속엔 이미 타자에 대한 지향이 숨어있다. 자기중심적인 글쓰기는 수다스러울 뿐 아니라, 깊은 신뢰를 얻기 어렵다.
--- p.177
시집 『악의 꽃』은 ‘차디차고 음울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으로 문학사에 충격을 몰고 온다. 그것은 전대의 시편들과 다른 ‘뜻밖의 놀라움과 기형적인 미’를 선보인 시집이기도 하다. 예컨대 권태, 악, 부패, 시체, 시궁창, 패덕 등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웠을 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저급한 감각으로 치부되던 후각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 그렇다.
--- p.178
아인슈타인은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정권 반대, 독일의 군사적 재무장 위험성, 신무기 제조에 대한 경고강연을 감행한다. 물론 그가 평화를 위한 행보만 한 건 아니다. 그는 과학자로서 본연의 의무를 게을리 한 적이 없으니, 죽을 때까지 매달렸던 ‘통일장이론’은 물론, 상대성과 양자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논문을 끊임없이 발표한 게 그것이다. 76세, 임종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역시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는 당부였다.
--- p.185
톨스토이는 부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객사했다. 지금도 야스나야 폴라냐에 있는 그의 소박한 묘엔 비석조차 없다. 그의 유지 때문이다. 나는 톨스토이가 이미 부활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 p.191
E.H.카가 ‘누구도 섬은 아니며,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일 뿐’이라 한 말을 기억하자. 인간은 다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굴레와 상황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시대를 뛰어넘는 개성이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역사적 경고다.
--- p.194
어처구니없이 죄인이 된 소크라테스나 코페르니쿠스, 사형 직전 풀려나 유배를 당했던 도스토예프스키, 안목이 모자란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대책 없이 가난했던 반 고흐, 망명객 라흐마니노프. 그뿐인가. 끼니를 거르며 책 속에 고개를 묻었던 이 땅의 궁핍했던 선비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p.229
얘야, 목련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단다 화사한 눈빛으로 제 안의 비밀을 토해내지만, 그때 목련은 죽음의 발치에 다가선 것이므로.
--- p.235, 「목련을 읽는 순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