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제자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교수님, 이 지독하게 어둡고 힘든 터널의 끝은 과연 있을까요?” 이 한 문장을 읽고 저는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로마에서 학위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제게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가끔 장거리 이동을 위해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면 터널을 지날 때마다 숨을 꾹 참고 있다가 빠져나가면 크게 내쉬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금,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라는 생각에서 은연중에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제자의 질문을 받고 저는 가슴이 답답하여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한두 마디로 답할 수 있을까요? 답을 빨리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터널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구불구불한 길에 간간이 터널이 있었지만 요즘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터널이 정말 많습니다. 돈도 없고 기술도 부족하던 시절엔 어쩌다 터널 하나를 만들었다면, 요즘은 자본이 풍부하고 기술이 발달하여 산을 뚫어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터널이 많아지고 길어졌어요. 젊은이들이 시대를 맞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 p.18~19
요즘에는 한 가정에 자녀가 한두 명 안팎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뭐든 다 해주는 평범한 가정들이 많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안타깝게도 하고 싶은 일이 없거나 아니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 않아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반대로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지레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스스로를 독립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일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 계속 부모를 원망하고 탓한다면 누구 손해일까요?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여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이 선택한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의 능력이 곧 내 능력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나면 공부든 일이든 반드시 해야 하는 ‘절실’하고 ‘절박’한 동기가 생깁니다.
--- p.57
겨울 동안 나무는 잎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죽은 게 아닙니다. 다시 잎을 피울 때까지 묵묵히 찬바람을 견디며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사람보다 자기관리를 더 잘합니다. 세찬 바람에 스스로 가지치기도 하고, 한 해 동안 풍성하게 키웠던 나뭇잎도 미련 없이 떨어뜨립니다. 둘러싼 껍질이 단단해지고 때로 불필요한 건 스스로 걷어냅니다. 사람이 지루하고 지난한 공부를 해나가는 시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에 얼마 달려 있지 않은 나뭇잎에 집착하고 그걸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보호막으로 삼습니다. 그보다는 “내 능력이 좀처럼 향상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리면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허세가 공부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실제의 나’와 ‘내가 평가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척하는 건데요. 그러다가 남이 이룬 걸 부러워하고 시샘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지인들이 잘됐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소식을 접할 때 저는 부러워하거나 혹은 질투하지 않고 행간에 숨겨진 그들의 노력과 수고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저의 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 p.76~77
하루 공부한 뒤 며칠씩 공부를 손에서 놓는다면 언제 어떻게 공부하는 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무조건 규칙적으로 뭔가를 해봐야 자신의 공부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고 몰랐던 습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공부하려 들지 말고 몸이 공부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일정한 시간에 책상에 앉고 계획표를 짜서 ‘몸이 그걸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차근차근 실천해야 합니다. 벼락치기가 가능할 때는 머리로 공부하는 거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몸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매일 습관으로 쌓인 공부가 그 사람의 미래가 됩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선 자신의 생활 방식과 성향을 파악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은 계획을 세우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의기소침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어느 시간에 더 집중이 잘 되고 어느 시간에 집중이 안 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시간인지, 공간인지, 습관인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해요.
--- p.102
학교 안팎에서 많은 학생이 제게 “교수님, 변호사 시험은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어떻게 해야 시험을 잘 볼 수 있어요?”라고 묻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공부는 100퍼센트 준비한 가운데 20퍼센트를 발휘해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시험에 합격하는 거라 대답합니다. 100퍼센트 완벽하게 준비하면 어떤 부분에서 20퍼센트를 골라 문제를 내도 좋은 결과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60퍼센트 정도만 공부하고는 100퍼센트의 실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생각의 오류입니다. 어쩌다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기는 힘들고, 그런 패턴으로 공부하면 결국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공부가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의 양이 땅을 흠뻑 적시고도 남아 흘러내리는 빗물과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 p.125
기억의 정화는 몸을 가둔 채로 공부하면서도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정신이 가장 자유로울 때는 역설적으로 몸을 가두었을 때인 듯합니다. 전쟁 중에 포로로 감옥에 갇혀서도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비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애벌레 시절과 번데기 시절에 몸을 가두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부뿐 아니라 무언가 사람의 정신세계가 한 단계 성장하고 고양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대인들은 인간 존재를 영적으로 정화하고, 불멸과 영생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으로 동틀 녘, 정오, 일몰, 이렇게 하루 세 번 몸을 씻었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틈이 날 때마다 부정적인 기억을 자주 씻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명상이나 기도는 그런 면에서 공부하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의식입니다.
--- p.187
사자처럼 똑똑하고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목표를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사자처럼 능력 있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게 더 많았습니다. 제가 유학하면서 가졌던 단순한 하루 일과표는 많은 것들을 포기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여행이나 모임, 교류를 위한 자리도 대부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일과표를 단순하게 짜면서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현저하게 높아졌습니다. 사람들과 친교하는 시간은 없었지만 운동하고 휴식할 시간은 꼭 넣는 식으로 일과표를 짜서 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꾸준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를 잠시 포기하더라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관계로 망가뜨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만나지 않아도 늘 그리워하는 사이, 만나지 않아도 유대관계가 돈독한 사이, 그게 친구 사이지요.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면 진짜 친구이고, 당신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줄 겁니다.
--- p.216
라틴어의 중간태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설명한다면, ‘무엇 같은 상태’,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 ‘무엇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상태’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흔히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 주관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중간태’는 피할 수 없지 않을까요? 시간은 항상 흐르고 있고 그것이 꼭 변화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다양한 상황과 과정의 중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론이나 목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것 또한 얼마든지 더 큰 다른 과정 속의 어딘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나 과정 속에 놓인 존재라면 ‘내가 무엇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자각이 꼭 잘못된 건 아닙니다.
공부하다 보면 무엇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명확하지 않고 어정쩡한 상태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공부뿐 아니라 생각도, 입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왜 꼭 어느 한쪽에 속해야 합니까? 우리는 도리어 어느 한쪽에 완벽하게 속하기보다는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의 방향성 위에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자신이 향하지 않은 곳에 대한 비판적 시각뿐만 아니라 내가 향하는 곳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중간을 ‘기회주의’라 여기며, 어느 한쪽에 서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많은 선택지 중 우리가 ‘명백하고 확실하게 치우쳐 규정된 한곳’에 위치할 상황만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p.29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