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적어도 인류의 상당수는 지금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역사를 주전과 주후로 나눈다. 주후 2000년에 세계 인구는 60억에 달했으며, 한편 그리스도인은 17억 명 혹은 28퍼센트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인류의 거의 3분의 1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성경의 초점이시다. 성경은 종교적 문헌을 아무렇게나 수집해 놓은 책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리고 기독교 학자들은 언제나 이 점을 인정해 왔다. 예를 들어, 4-5세기의 위대한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에 대한 무지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다”라고 썼다.
16세기에 르네상스의 주도자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주도자 루터가 둘 다 똑같이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이 “그리스도를 너무나 가까이 친밀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만약 그분이 눈앞에 서 계시면 오히려 더 안 보일 것이다”라고 썼다. 루터도 마찬가지로 『로마서 주석』에서 그리스도가 성경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로마서 1:5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성경을 이해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즉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런 후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성경 전체는 도처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다루고 있다.”
셋째, 예수님은 선교의 핵심이시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가 되어 육지와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과 문화권으로 들어가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어떤 문명, 제도, 이념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이 점은 특별히 이슬람 세계를 대상으로 한 기독교 선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자이며 선교사 스티븐 닐은 이렇게 썼다. “우리 과업은 무한히 인내하면서 이슬람 교도들에게 ‘예수를 생각해 보시지요’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메시지란 없다.…이슬람 교도가 나사렛 예수를 보고 나서도 그분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 p.17-19
그러므로 내 계획은 신약에서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연구하고(이 책의 1부와 4부), 교회사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소개해 왔으며(2부), 어떻게 사람들이 그분의 영향을 받았는지(3부) 살펴보는 것이다. 좀더 상세히 말하자면,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신약은 예수를 어떻게 증거하는가? 나는 예수에 대한 신약의 증거는 분명 매우 다양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 증거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1부를 ‘원래의 예수’라고 부르겠다.
둘째, 교회는 수십 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해 왔는가? 2부를 ‘교회의 예수’라고 부르겠다. 어떻게 교회가 각 시대마다 때로는 신실하게 때로는 신실하지 않게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했는지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3부는 2부를 보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에 소개에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도전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교회사의 각 단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 각 단계를 살펴볼 것이며,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하는) 각 단계가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을 ‘영향력 있는 예수’라고 부르겠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4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분(실로, 먼 옛날 역사에 존재했던 인물)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분(사실상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와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는 분이심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예수는 구세주, 주님, 심판자로서 모든 새 세대와 세기와 천년을 맞이하신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부분은, 신약의 마지막 책으로 기독교 묵시 문학인 요한계시록을 배경으로 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첫 구절에서 그 책이 그저 하나의 예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 가지 환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경과 역사의 종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약 전체와 특히 요한계시록을 배경으로, 교회가 제시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리스도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규범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진정한 예수이시다. 인간들의 묘사는 모두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진정한 예수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바라건대 성경과 교회사에 대한 이 연구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이 책 제목이 옳다는 것을 밝혀 주었으면 한다. 예수님과 같은 분은 없다. 지금까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20-21
신약 문헌(제4부에서 다루게 될 요한계시록은 제외하고)을 이렇게 간략하게 개관해 보기만 해도 그 다양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저자(적어도 9명이 관련되어 있다), 문학적 형태(복음서, 연대기, 서신, 논문, 묵시),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다루는 주제, 신학적 강조점 그리고 예수님을 제시하는 면에서 다양하다.
하지만 이 동일한 신약성경은 메시지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바울에 따르면 모든 사도가 그리스도의 동일한 복음을 선포했으며 모든 교회가 이를 믿었다(고전 15:11). 또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한 소망…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4-6).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에 유럽을 지배했던 소위 “성경 신학 운동”은 이것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A. M. 헌터는 “신약의 본질적인 통일성과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 “모든 다양성을 초월하며 지배하는 통일성”이라고 쓸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영향력 있는 또 하나의 책은 에드윈 호스킨스와 노엘 데이비가 쓴 『신약의 수수께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수께끼”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과 교회의 열렬한 믿음의” 관계였다. 호스킨스와 데이비는 증거를 주의 깊게 고찰한 후에, “신약의 다양한 자료 전부는 하나의, 단일한, 고립된 역사적 사건에 집중되며 거기서 기원하는데” 그 사건은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되어 다양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인위적인 화합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또한 일부 신약학자들이 명백한 불일치를 찾아내는 일에서 오스카 쿨먼이 “거의 가학적인 기쁨”이라고 부른 것을 느꼈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이제 ‘성경신학’이란 없다고 말했다. 상호 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성경신학들’이 있을 뿐이었다. 사도들의 이름은 형용사로 바뀌었으며, 학자들은 어떤 교리에 대한 ‘누가의’ 또는 ‘바울의’ 견해나 ‘베드로의’ 또는 ‘요한의’ 입장에 대해 썼다. 마치 그것들이 서로 배타적이기라도 하다는 듯 말이다.
신약의 증거를 통합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가장 거리낌 없이 비판한 사람 중 하나는 더럼 대학교의 제임스 던이다.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에서 그는 초대 기독교에는 정통에 대한 통일된 개념이 없었다고 썼다. 이어서 그는 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쓴다. 적어도 네 개, 곧 요한의 복음, 공관복음서의 다른 복음 그리고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나오는 두 개의 또 다른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영단번의, 통합시키는 ‘케리그마’(kerygma)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동시에 던은 신약에 “통합시키는 요소”, 즉 “역사적 예수와 높임 받은 예수 사이의 통합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책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최소한만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제멋대로 성경 본문을 조작해서 인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할 수는 없다는 것, 외견상 불일치로 보이는 것들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 각 신약 저자가 말하는 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단연코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지금까지의 개관을 통해 네 복음서가 서로 보완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예수님과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의 열세 서신 역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더 독특하게 유대적인 책들(야고보서,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역시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다. 심지어 바울과 야고보까지도 서로 다른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 찰리 모울이 썼듯이, 모든 신약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지금 초월적인 주님으로 인정되는 분과 연속성이 있다고 인정된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에 헌신”하는 데서 그들의 하나 됨을 발견한다.
--- p.10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