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회원들에게 라캉이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은 프로이디언들을 통탄하며‘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 건 일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곧 우리의 공부가‘프로이트의 텍스트로 돌아가자’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독회 기간 동안 독서를 위한 독서는 지양해 달라고 주문했다. 텍스트와 독자를 잇는 독서공간에서존재의 전환이 일어나는 감동의 접점을 찾아달라고도 말했다. 영혼의 떨림을 경험해 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아하’의 체험이다. 글을 통한 영혼의 떨림, 얼마나 벅찬 감동일까.
뒤풀이에서는 소주와 삼겹살이 나왔다. 불판 위에 고기와 김치를 올리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프로이트의 눈에는 지구 반대편의 한 작은 나라에서 늦은 밤 삼겹살을 구우며 자신의 텍스트를 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비쳐질까. 그의 무엇이 20세기 전 유럽을 흥분시켰던 것일까.
--- pp.35~36 「환,‘삼겹살과 프로이트’」중에서
신혼 때였다. 결혼 전에 남편과 혼담까지 있었다는 여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여자고등학교의 가정선생이라는 그녀는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나의 신혼집에 들어서자마자 친척 집에라도 온 듯 스스럼없이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죽순이었다.
나는 좀 의아했다. 상식적으로 신혼집에는 꽃이나 과일, 아니면 케이크 정도가 무난할 것이다. 죽순이라면 전문 요릿집이나 술집 같은 데서나 쓰이는 식재료가 아닌가. 더구나 나는 그녀와는 달리 대학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온 풋내기로서 죽순 요리는 해 보지도, 먹어 보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지금이 죽순 철이라서요. 연하고 향이 좋아 조금 사 와 봤어요.”
어머니에게인지 남편에게인지 교태 섞인 표정으로 말한 그녀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향해
“죽순 볶음 해 보셨죠? 술안주로 일품인데~. 제가 도와 드릴까요?”
부엌에서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도마와 칼과 불을 장악한 그녀는 오래된 안주인처럼 분주하게 죽순을 다루는데 정작 주부인 나는 손님처럼 그녀의 왼쪽에 붙었다가 오른쪽에 서 있다가 했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와 남편의 난감해하는 표정에서 나는 그녀가 왜 찾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보다 자신이 훨씬 세련되고 음식 솜씨까지 좋은 여자라는 것을. 자신이 남편을 놓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자신을 놓친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직접 확인하고, 남편에게도 각인시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왜 그토록 헤어진 남자의 신혼생활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는지는 정신분석가 라캉이 설명한다. 라캉은 오래전부터“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 깊이 천형과도 같은 욕망 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어느 공사장 외벽에‘들여다보지 마시오’란 문구가 적혀 있을 때‘들여다보지 말라고 하니 보지 말아야지’라며 가볍게 돌아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들여다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더욱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나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탕아처럼 밖으로 나도는 욕망이다. 떠난 남자에 대한 그녀의 욕망 또한 그가 딴 여자의 남자가 된 순간 꿈틀거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어쩌면 외벽 구멍을 통해 금지된 것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었을까.
--- pp.104~105 「욕망, ‘죽순’」중에서
나 역시 가끔은 시간을 거스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처럼 계단을 날듯이 오르내리고 싶고, 목젖이 보이도록 큰 소리로 웃어 보고도 싶다. 자전거로 국토종주도 해 보고 싶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도 당당하게 참가하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드리 햅번을 한번 만나고 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그레타 가르보는 관심이 없는데 오드리 햅번과는 따뜻한 차 한 잔 나누고 싶다. [로마의 휴일]을 찍은 스페인 계단에서 젤라또도 함께 먹어보고 싶고, 아프리카로 달려가 기아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메모하고 싶다. 아, 나는 그동안 무얼 하며 살았나? 나의 시간은 왜 이렇게 의미 없이 흘러가 버렸나?
베갯잇을 갈고 나서 삼베 이불을 펼쳐든다. 여름철 침구로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한 조합이다. 그런데 문득 수의壽衣 또한 삼베로 만드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환갑 때 이미 수의를 장만한 시어머니가 생각난 것이다. 당시에 나는 갓 시집온 새댁으로, 수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죽을 때 입는 옷이라기에 죽기 전“잠깐만!”하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가 했다. 죽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삼베 이불에서 수의를 떠올린 건 사고의 진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이불 따로, 수의 따로 기억 상자가 달랐다. 시간의 이해로 의식 어딘가에서 상관관계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발견이다. 길가메시와 진시황마저 자빠뜨린 절묘한 공식이다.
--- pp.132~133 「욕망, ‘시간을 거슬러’」
“누구시오?”
“아이고!”
복도로 나와 자초지종을 들은 남자는 나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7번이겠네요.”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방은 1호부터 20호까지 있다. 방문 앞에 그렇게 쓰여 있기도 하다. 내가 자신 있게 기억하는 것은 기차를 탈 때 첫 번째 침대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호 아니면 20호일 터인데 난데없이 7호라니?
나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원체 나는 수數에 약하다. 수치數恥에 가깝다. 오죽하면 아들은 나의 증상을 질병 수준이라고 했을까.
나는 나를 버리고 남자를 믿기로 했다. 7호방으로 가서 문손잡이를 잡으려 하는데 추리닝을 입은 방주인 남자가 안에서 불쑥 문을 열고 나온다. 이 방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남자는 나의 ‘첫 번째 방’을 주목하더니,
“그런데요, 몇 호차였지요?”
“아, 몇 호차? 3호차였는데요”
“여기는 1호차 침대칸입니다. 3호차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구나. 화장실을 찾아 빙빙 돌다가 1호차까지 와 버린 모양이구나. 그는 친절하게도 나를 방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친구는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자리에 누웠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20호 남자는 왜 나를 7호 여인으로 찍었을까. 그는 왜 나를 보자마자 7호로 단정했을까. 귀찮았던 것일까. 골탕 먹이려고 그랬을까.
아하! 그제서야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이 포개어져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들 역시 나처럼 화장실을 다녀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 잠그는 일에 부주의한 사이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던 것이었다. 이국에서 치르는 중요한 이벤트에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이 들이닥친 셈이었다. 남자는 놀라 벌떡 일어났고, 나는 황급히 복도로 밀려났다.
그렇다면 남자의 ‘7’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7은 행운의 숫자로 알려져 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아마 행운의 찬스를 잡으려던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방해꾼을 치우려는 위기의 순간에 무의식중 7이 튀어나왔으리라 짐작되었다. 특별한 행사라 심야의 침입자에게도 벌 대신 행운을 조금 나누어 주고 싶었으리라. 기차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커덕거리며 새벽을 뚫고 달렸다.
--- pp.254~256 「아하, ‘아하!’」중에서